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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therine May 17. 2021

Gospel in Life #7

정의 - 타자를 위한 사람들

'정의'란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

플라톤 철학에서, '지혜용기절제의 완전한 조화를 이르는 말'


세상에서 통용되는 '정의'와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는 그 결을 같이 하지만 동기나, 기준은 하늘과 땅 차이다. 


'자비' '자격' '샬롬' 이 세 단어로 이번 챕터를 정리했다. 


다음의 질문들에 대답해 보라.

'정말로 자격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베푸는 도움은 자비인가?'


'샬롬이란?'


나는 사실 '자비'라는 단어가 싫다. 특히 이번 챕터에서 이 단어가 쓰인 것이 싫었다. '선의'정도면 좋지 않았을까. 잠잠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내 삶에 베푸시는 자비가 달갑지만은 않은 교만한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만 한다면, 바로 그 감사 제물이 이웃을 향한 자비로 나타난다는 거니까. 이웃의 삶, 그의 지적, 감정적, 영적, 육체적인 안녕을 도울 수 있는 것 또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데. 예수님은 나의 샬롬을 도우시는 분이시기에. 이 자연스러운 이치는 나의 연약함과 한계로 인해 왜곡되거나 변질되기 쉽다.


내 힘으로 선한 것을 낼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나', 내 삶조차 구원할 수없는 무력한 존재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철마다 피고 지는 푸른 잎 한 장도 나는 정말 '모른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내가, 하나님의 공급하심 없이 이웃을 돕고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으로도 비교가 불가능한 꼴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계신 이유 아닐까.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내려놓음이 아닌 낮아짐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가치에 의해 차등 배분되지 않는다. 그 사랑의 속성은 한없는 용서와 신실함이다. 이 사랑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생수의 강으로 흘러나올 때까지 나에게도, 예수께도 시간을 드려야 한다. 강도 만난 자가 선한 사마리아 인에게 도움을 받고 회복되기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저 살기 위해 쓰러진 그 자리에서 힘겹게 버티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던 것처럼, 혹 내가 크리스천이란 이유로, 강도 만난 나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를 강요하고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저 버티기밖에 못한다고 실망하며 좌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솔직하게 점검해 보길 바란다. 과부가 조심스럽게 낸 두 렙돈이 성전 안에 있었던 부자들이 낸 두둑한 헌금보다 가장 귀하고 가장 향기롭다고 말씀하셨던 예수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웃이란. 내가 돕고 싶고 나와 친한, 범주가 아닌 하나님의 마음이 쓰이고 그분의 시선이 머무는 자들이 된다. 또한 정의는 대단한 일이 아닌, 그 분과의 진실된 관계를 나타내는 지표로써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한 속성인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이웃의 총체적 형통, 그들의 샬롬을 위해 짐을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선행되어졌을 때, 그 기도 만으로도 나와 예수의 관계를 나타내는 지표가 됨으로써 크리스천의 삶이 산 위의 동네가 되게 하는 것이다.


역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가.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것을 그렇게 낮아질 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vFTNQOrL3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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