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말았어야 할 말 03
MBTI 식으로 말하면 나는 E와 I중의 I형 인간이다. 내가 I라고 하면 대부분 놀란다. 실제로 나는 E와 I를 가끔 오가고 E와 I 간 격차도 크지 않다. 어쨌거나 둘 중 조금이라도 점수가 높은 쪽은 I이다.
I형 인간이라는 걸 스스로도 잘 몰랐던 것 같다. 늘 활발하고 어디를 가도 모임을 주도하는 편이었고 무엇보다, 무언가를 말해야 하는 자리에서 나는 적게 말하는 쪽이기보다는 많이 말하는 쪽에 속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제는 '말해야 하는 자리에서'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회의나 독서 모임 같은 곳에서는 말을 하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제가 먼저 말할게요" 스타일은 또 아니다. 기회가 오면 하고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하기도 한다. 물론 친한 친구를 만났을 때는 예외다. 아무리 말수가 적은 사람도 친한 친구를 만나면 평소보다는 더 많이 말하니까.
이런 내가 I형 인간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MBTI 테스트를 해보기 전이었다.) 좋아하는 운동의 동호회 모임에서 운동이 끝나면 밥자리와 술자리가 이어지곤 했다. 얼굴만 아는 사람이 더 많아서 밥자리도 술자리도 편하진 않았지만, 대부분은 상식적이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라 불편하지도 않았다. 나는 좋아하는 운동을 많이 좋아했고 그 운동을 오래 하고 싶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뒤풀이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하지만 이미 친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말들 사이에 말을 섞어 넣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하려면 할 수도 있지만 내가 말하지 않아도 오디오가 꽉 차는데 굳이 애를 써서 내 이야기나 내 생각을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저 듣고만 있는 때가 많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라도 그것을 메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누군가 말을 걸거나 무언가를 물어보면 대답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길지 않게. 내가 대답하는 동안 관심이 내게 쏠리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부담스럽다고 느꼈을 때, 그때 조금 당황했다. 어,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가 그런 사람이 된 건지 그건 여전히 확실치 않고 여하튼 최근의 나는 그랬다.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 한마디 안 하고 앉아 있으면서 뒤풀이는 꼬박꼬박 오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겠지' 하는 짐작에서의 '이렇게'는 대부분 내 안에서 오는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짐작인 거다.
대학교 때 동아리 모임이나 과 모임에서 그런 사람을 많이 봤다. 특히 우리 동아리에는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는 거의 목소리를 듣기 힘든 동기들이 꽤 많이 있었다. 너무 말이 없어서 선배들이 어김없이 "말 좀 해. 아무 말이라도 좀 해봐"라는 말을 하게 했던. 그땐 속으로 저렇게 아무 말도 안 할 거면서 왜 늘 술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게다가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걸까 궁금해했다. 어떨 땐 "그래 말 좀 해봐" 하고 나도 같이 거들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거드는 말도 하지 않게 됐는데 그것은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일이기보다는, 어차피 소용없을 텐데 하는 학습과 포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부끄럽게도.
사람들이 말 좀 해보라고 할수록 말 없는 친구들은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누군가가 말 좀 해보라고 말하는 순간 (정말로 말을 하는지, 한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가뜩이나 사람 많은 자리에서 말이 없던 사람이 모든 시선이 쏠린 상황에서 시킨다고 해서 곧바로 말을 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하지만 누군가 '말 좀 해보라'라고 포문을 여는 순간 주변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 말도 좋다거나 목소리 좀 들어보자거나 하는 식의 말을 보탰다. 그리곤 조금 기다리다가 이내 포기하고 다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엔 멋모르고 같이 거들었던 나도, 어느 순간 더는 하지 않게 됐다. 하지만 얼마간은 말 좀 해보라고 하는 사람들보다는 말없이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을 조금 더 이질적으로 여겼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말 없는 사람보다 말 좀 해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더 신경이 쓰였다. 말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예의와 배려가 부족하다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어떤 자리에 참석한다고 해서 반드시 말해야 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많이 하고 누군가는 적게 하고 누군가는 거의 하지 않기도 한다.
말없이 앉아 있는 사람이 불편하다고 느껴지거나 신경이 쓰인다면 거기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소외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서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말이 너무 많은 자신이 의식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짐작할 수 없는 다른 이유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런데 말이 없을 뿐이라면, 그건 그 사람이 그러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이제는 생각한다. 그 사람과 정말 대화하고 싶다면 '말을 하라'라고 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말을 걸면 된다.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도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가고 싶으면 가고 말하고 싶으면 할 것이다.
한번은 동호회 뒤풀이에서 그나마 안면이 있던 사람들과 떨어진 테이블에 앉게 됐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비어 있는 자리가 거기뿐이었는데 그 테이블에서 주로 말하는 사람의 말이 너무 듣기 싫었다. 대부분이 상대를 비하하는 말이거나 성적인 농담이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유쾌하게 받아주었고, 어떤 사람은 반박하거나 저지하기도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자리를 옮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너무 말없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당시 동호회 회장이 멀리서 나를 부르며 거기 있죠? 하고 물었다. 나를 챙겨주는 말이었다. 나는 웃으며 여기 있다고 대답했다. 바로 그때, 듣기 싫고 쓸데없는 말만 끝없이 하던 그가 말했다.
"어? 말할 줄 아네? 벙어린 줄 알았는데."
싸우고 싶지 않아서 참았는데, 싸울 걸 그랬다. 정도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서는 무례한 말을 그날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할 거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해서 너무 당황하기도 했다. 기분이 나빠야 할 상황에 기분 나빠하지도 못할 만큼 놀랐다. 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과를 받아낼 것이 아니라면, 그 말을 계기로 오히려 말을 섞게 될까 봐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잠시 후 다른 테이블의 자리가 비었을 때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날, 말 좀 해보라는 말을, 모임이 있을 때마다 누군가로부터 한 번씩은 꼭 들어야 했던 과거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 곁에 앉아 그래 한 번 들어보자 하는 표정을 짓고 웃음 띤 얼굴로 그들이 말하기를 기다리던 과거의 나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