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일이 지났어요 ㅠ_ㅠ
지난 3월 17일, 브런치에서 알림이 왔다.
작가님 글을 못 본 지 무려.. 120일이 지났어요 ㅠ_ㅠ 작가님 글이 그립네요.. 오랜만에 작가님의 시선이 담긴 글을 보여주시겠어요? ꈍᴗꈍ
이 알림을 보고 들었던 생각 1.
120일밖에 안 됐어? 120일 전에는 뭘 쓴 거지?
(생각만 하고 찾아보진 않음)
이 알림을 보고 들었던 생각 2.
제 시선 같은 건 없어요.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모니터 모니터 모니터..
그러고도 대략 25일이 지난 지금 브런치에 들어왔다.
내 시선이 담긴 글 그런 거 모르겠고 뭐라도 써야겠다, 뭐라도 하는 마음에.
작년 한 해 동안 책을 정말 적게 읽었다. 작년 12월에 읽은 책 0권. 올해 1월에 읽은 책 0권. 2월에도 0권. 읽다 만 책은 30권 정도 되는 것 같다. 책 읽기라는 걸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래로, 그러니까 대략 10살 때 이후 가장 적게 읽은 것 같다. 고3 때보다도 적게 읽었고, 한창 술 마시러 다니던 대학교 1학년 때보다도 아마.
이것은 대략 3월까지만 해도 비슷했다. 그리고 4월에 들면서, 더는 안 되겠다, 못 참겠다. 요즘의 내 삶 너무 곤충의 바디같이 머리, 가슴, 배로 이뤄졌다. 일, 스쿼시, 고양이, 일, 스쿼시, 고양이.. 라고 인스타그램에 쓰고 나서 더는 못 참아! 하는 심정이 되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당시 읽었던 책은 정지돈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였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알라딘 북플 기록으로 봐서는 작년 11월 14일부터였던 것 같고, 그때 읽기 시작한 책을 3월 31일에 다 읽었다. 그 사이에는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뭔가 찔끔찔끔 읽긴 했지만 마지막까지 읽은 책이 없고, 기록도 없다.
뒤이어 읽은 책은 콘라드 죄르지의 『방문객』. 이건 더 심한데, 9월 19일 읽기 시작해서 4월 3일에 다 읽었다.
두 책 모두 읽을 때 틈틈이 좋았고 때때로 좋았지만 몰입할 수 없었고 집중할 수 없었다. 전적으로 이건 나에게 원인이 있었다. 시간보다는 에너지가 없었다. 활자를 눈으로 읽고, 머리로 생각하고, 뭔가를 느끼는 데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없었다.
그렇지만 일만 하고 잠들기에는 또 억울해서 늘 OTT 서비스로 뭔가를 봤다. 자기 전에 틀어놓는다. 보다가 잠든다. 다음날 잠들기 전에 전날 어디까지 봤는지 찾는다. 찾아서 보다가 또 잠든다. 다음날 잠들기 전에.. 원래는 '다음화 보기' 버튼을 누르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귀찮아서 연속재생 설정을 해뒀는데 연속재생도 꺼버렸다. 자고 일어나면 내가 잠든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해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려고 할 때 어디까지 봤는지 찾아내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11시 30분쯤 퇴근했다(아직 잠들지 않았으니까, 아직 내 하루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오늘이라고 해두자). 출근할 때까지만 해도 오늘은 제때 퇴근해야지,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일을 시작해보니 웬걸, 50분에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날 여유도 없었다. 지난 1년간의 나였다면 11시 30분에 퇴근을 한 직후 이런 일들을 했을 것이다.
그니(우리집 둘째 고양이의 이름이다)의 엉덩이를 두드려준다, 사진을 찍는다, 으니(우리집 셋째 고양이의 이름이다)랑 놀아준다, 사진을 찍는다, 고양이 화장실에서 감자와 맛동산을 수거한다, 고양이들 물그릇을 씻고 깨끗한 새 물로 채워준다, 사진을 찍는다, 맥주를 마신다, OTT 서비스에서 뭔가를 튼다, 미리(우리집 첫째 고양이의 이름이다), 그니, 으니에게 간식을 준다, 사진을 찍는다, 바닥에 흩어진 화장실 모래를 치운다, 그리고 또 그니 궁팡, 으니 쓰담, 미리와는 눈인사(미리는 아직 만질 수 없다), 자리에 눕는다, 인스타그램에 미리그니으니 사진을 올린다, 다른 고양이들을 보며 웃고 운다, 좋아요를 누른다, 미리그니으니가 다시 보고 싶어서 보러 간다, 궁팡을 한다, 쓰담을 한다, 눈인사를 한다, 고백을 한다, 다시 자리에 눕는다, 인스타그램에서 고양이들을 보며 운다, 잠든다, 이 사이에도 OTT 서비스는 계속 켜진 상태고, 나는 항상 그것이 꺼지기 전에 잠든다.
그러나 오늘은 그니 궁팡만 해주고 일단 노트북을 켰다, 브런치를 열었다. 뭐라도 쓰고, 다듬지 말고, 막 쏟아내자, 라는 마음으로. 몇 년 전 이후북스에서 감히 글쓰기 워크숍의 멘토로 참여했을 때 내가 늘 빼먹지 않고 했던 말이다.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처음부터 완성을 꿈꾸지도 말고, 그냥 일단 쓰는 게 중요하다고. 뭐 사실 여러 사람이 했던 말이라 새로울 건 없지만 일단 쓰는 게 중요하다는 건 정말 중요한 것이라서, 그게 시작이라서 꼭 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그렇게 못했다. 일단 뭐라도 쓰는 걸 할 수가 없었다, 고 핑계를 댄다.
카프카도 보험공사를 다니면서 퇴근 후에 글을 썼고, 정지돈도 출판사를 다니면서 퇴근 후에 글을 썼고, 한때는 나도 회사 다니면서 글을 쓰고, 책을 만들었다. 내 글도 쓰고, 남의 글도 편집하고, 회사일도 하고, 스쿼시도 했다. 다 했다. 다 해서, 스스로도 그렇게 다 한 내가 신기하고 그랬는데.
며칠 새 몇 권의 책을 빠르게 읽었다. 그리고 한 권의 책 읽기를 과감하게 포기했다. 한 30페이지 정도 읽었는데도 이 책을 끝까지 읽었을 때 뭔가 기대되는 것이 없다면, 은 거창한 거고 그냥 재미가 없고 별 흥미가 일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덮어버리자.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현란한 세상』이었다.) 읽을 책은 너무 많고 사놓고 안 읽은 책도 너무 많다. 하면서 다음 책을 집어들었고 그 책도 뭐 그렇게 엄청나게 좋지는 않았지만 잘 읽혀서 그냥 후루룩 다 읽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패배의 신호』였다.)
김지연의 『마음에 없는 소리』도 읽었는데, 단조롭고 규칙적인 삶을 사는 것을 "곤충이 된 기분"으로 표현한 걸 보고 소름도 돋아봤다. "머리, 가슴, 배로 나뉜 몸을 갖고 유전자에 새겨진 대로 규칙적인 삶을 살아내야 했다"고 쓰여 있었는데, 며칠전 내가 인스타에 쓴 "요즘 나의 삶 너무나 곤충의 바디같이 머리 가슴 배로 구성됐다"와 일맥상통, 닮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깨달은 것 1.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생각은 없어.
그러면서 다시 한 번 깨달은 것 2.
명백한 표절과 우연의 일치는 엄연히 다른 거야.
지금은 다시 정지돈의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을 읽고 있다. 너무 재밌다. 정지돈의 유머, 그에게 금정연과 오한기와 이상우라는 친구가 있는 것, 책에 나일선 작가도 등장하는 것. 그리고 그가 인용하는 수많은 다른 책, 다른 작가. 그것을 정지돈이라는 작가가 다시 쓰고 인용하는 방식. 그런 것들이 재밌고, 그렇게 많고 다양한 책을 내가 스스로 읽지는 못하지만 내가 읽었다면 좋아했을 것 같은, 밑줄을 그었을 것 같은, 그렇지만 그렇다고 정확히 기억하지도 못했을 것 같은, 그런 구절들만 대신 읽고 메모해두었다가 재밌게 써주는 것 같다.
유머. 정지돈의 유머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유머야말로 세상과 대상에 대한 가장 깊은 애정의 증거라고. 자기자신을 기꺼이 웃음거리로 만든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그만큼 깊이 애정하는 것이라고. 애정이 없는 대상에 대해서 말하고, 그런데 재밌게 말하고, 다른 사람을 웃게 하고, 다시 한 번 곱씹게 하는 그런 표현을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정지돈이 글에서 가장 많이 웃기는 부분은 문학과 주변 인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쓸 때다. 그것만 봐도 그것이 곧 깊은 애정의 증거라는 것의 증거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래서, 예로부터 내가 나를 놀려먹는 사람들을 대체로 다 좋아했던 것 같다. 비꼬는 방식이나 하대하는 방식으로 놀리는 건 당연히 해당되지 않음!
뭐라도 써야지, 한 줄이라도 써야지, 했는데 길어지고 있다. 사실 더 쓰고 싶은 글자들이 있지만 이제 마치기로 한다. 조금씩 꾸준히 쓰는 게 중요하다. (대체 왜? 피곤한데 왜? 어쨌든 나에게 그것이 중요하다는 걸 안다. 안 써 보니 알겠다.)
이제 해야 할 일들을 한다. 고양이들의 화장실을 치우고 밥그릇을 씻고 물을 갈아주고 또 좀 만져주고 놀아주고 그러고도 졸음이 쏟아지지 않는다면 정지돈이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을 한 챕터 정도 읽다가 잠들어야지. 한 챕터만이다. 두 챕터, 세 챕터 읽다가는 또 잠때를 놓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내일 너무 피곤하다. 내일 피곤할 것을 생각하게 된 내가 슬프지만 피곤해서 오늘의 결심을 하루로 그치는 것이 더 슬프기 때문에 너무 늦지 않게 자기로 한다.
일단 감자와 맛동산부터 캐러 가자. 퇴고는 없다! 맞춤법 검사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