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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shun Apr 04. 2024

클래식을 위한 일본어

33. 巡礼の年 (じゅんれいのとし)

巡礼の年(じゅんれいのとし) 는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가 청년시절부터 생애에 걸쳐 작곡한 몇 편의 피아노 작품들을 묶은 연작을 가리키는 제목입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amazon.co.jp/リスト-巡礼の年-第3年(全7曲)-コチシュ-ゾルタン/dp/B00005MWHM


리스트는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지역을 여행한 경험을 담아 이 시리즈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리스트가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만큼, 이 작품의 원제는 프랑스어 Années de pèlerinage로 발표되었습니다. 영어로는 Years of Pilgrimage라고 번역해 표기하기도 하지만, 영어권에서도 대개는 프랑스어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는 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본과 똑같이 "순례의 해"라는 제목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다른 일본식 제목(巡礼の年報)을 따라 "순례연보"라고 쓰기도 합니다. 중국어로도 巡禮之年라고 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kbookstore.com/catalog/product/view/_ignore_category/1/id/50972/s/9-9788955451368/


이 제목은 독일의 작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대표작 중 하나인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Wilhelm Meisters Wanderjahre oder die Entsagenden, 1829)"의 프랑스어 번역본 제목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리스트가 유럽에서 한참 활동하던 시기에 발표된 소설이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괴테의 두 작품에 대한 일본어 제목은 각각 ヴィルヘルム・マイスターの修業時代ヴィルヘルム・マイスターの遍歴時代로, 한국어 제목과 거의 같습니다. 


같은 의미를 표현하는 단어가 

독일어일 때는 '편력'으로, 프랑스어일 때는 '순례'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순례'가 갖는 종교적 이미지 때문인지, 

한중일에서 리스트의 '순례의 해'에는 더욱 경건한 이미지가 더해져 있는 듯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2013년에 발표한 소설의 제목에는 바로 이 "순례의 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色彩を持たない多崎つくると、彼の巡礼の年" (文春文庫, 2013)

소설 속에는 리스트의 이 작품이 수록된 음반을 들으며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b-bunshun.ismcdn.jp/mwimgs/a/1/480/img_a1b5e3dbd4768814f2b354f0a211a9e0125045.jpg

이 소설의 영어 제목은 "Colorless Tsukuru Tazaki and His Years of Pilgrimage", 프랑스어 제목은 "L'Incolore Tsukuru Tazaki et ses années de pèlerinage"입니다. 모두 리스트의 피아노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국어판에서는 이 "순례의 해"를 "순례를 떠난 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출판사의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굳이? 소설의 중요한 키워드이자, 흔히 통용되는 음악작품의 제목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21196


한편 지난 2022년 일본의 타카라즈카 가극단에서는 리스트와 "순례의 해"를 소재로 각색한 뮤지컬을 상연했습니다. 이 공연은 DVD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일본 문화에서 "순례의 해"라는 제목을 활용하는 저력?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kageki.hankyu.co.jp/revue/2022/junreinotoshi/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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