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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스보이스 Feb 15. 2022

불편함이
나만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유스보이스 프렌토, 정혜란



유스보이스를 통해
나만의 표현 언어가 생겼어요


인터뷰어 : 유스보이스 프렌토, 사전제작지원. 정혜란

인터뷰이 : 유스보이스 프로젝트 매니저, 윤성민.


#. 불편함이 나만의 표현으로

대안학교를 다니며 열등감과 불안감을 가졌다. 남들과 같지 않은 비주류라는 게 시작이었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는 걸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불편했다. 말하고 싶은데, 하지 못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중 유스보이스 프렌토 활동을 했다. 처음으로 나의 불편과 불안에 대해서 말했다. 반응은 뜻밖이었다. "나도 그래, 너 멋지다." 내가 느끼는 불편과 불안을 다른 사람들도 느낀다는 걸 알고, 공감과 위로, 표현의 중요성을 알았다. 프렌토 활동이 좋은 연습이 되어, 지금도 불편함을 표현하고, 주변 사람들과 연대하고 있다. 프렌토 18기 정혜란의 이야기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정혜란입니다. 프렌토 18기로 활동했고, 현재 미국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어떻게 유스보이스에 참여하게 됐나요.

당시 금산 간디학교라는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었어요. 3기였는데, 윗 기수 언니 오빠들이 유스보이스를 알고 있었어요. 계속 이야기하고, 특히 친했던 언니가 '미디어 컨퍼런스'에 가보라고 해서, 2012년에 처음으로 신청해서 가게 됐습니다.



미디어 컨퍼런스에서 어떤 걸 했나요?

잡지팀에 들어갔었어요. 헤드에이크 샘들과 함께 했는데, 샘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자기 일에 신념과 믿음, 자신감이 있는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어요. 그때 '나도 크면, 나에게 자신 있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때 모습이 너무 멋져서, 지금도 책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면 멋져 보여요.


대안학교에서도 그런 프로그램은 많지 않았나요?

제가 다녔던 곳이 기숙학교다 보니까, 늘 보던 사람들을 매일 만나요. 3년을 알고 지내니 새로움이 덜하고, 심심한 감이 있어요. 가족처럼 느껴지지만, 새롭고 짜릿한 건 없는 느낌이에요. 그런데, 미디어 컨퍼런스는 정말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 같이하는 거잖아요? 랜덤 한 사람이 신청했다는 것 빼곤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게 신선하고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대안학교는 혜란님이 원해서 갔나요?

초등학생 때부터 다녔는데, 그때는 제 뜻이 아니었어요. 엄마가 대안학교에 관심이 많으셔서, 저를 보내신 거예요. 처음엔 힘들었어요. 제가 살던 지역과 달랐고, 그 때문에 학교에서 만난 애들과 잘 지내기 어려웠어요. 초2 때 처음 대안학교에 갔을 때 총 12명이었는데, 2~3년은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어요. 덕분에 책을 많이 읽었고, 학교 도서관 책 반 이상은 읽었어요.


미디어 컨퍼런스에선 어떤 잡지를 만들었나요?

SURFACE라는 잡지였어요. 저는 당시 보이는 거나, 옷 입는 거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쪽으로 잡지를 만들었어요. 겉으로 보이는 우리의 모습을 담은 걸로 기억해요. 기존 대안학교에서는 모내기, 바느질, 철학수업을 했었는데, 미디어 컨퍼런스 활동이 완전 새로운 자극이 됐었어요. 



필리핀에 간디 고등학교에서 졸업을 하고, 한국으로 다시 왔어요. 어떤 이유로 다시 돌아오신 거예요?

사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에 갈 생각이 없었어요. 대학교 가서 뭐하나 싶었고, 또 대안학교 졸업 후 한국 대학교 가는 게 복잡해요. 연계가 잘 안되기도 하고, 편견도 있고. 그래서 안 가야지 생각하고, 한국에서 갭이어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들어온 거예요.


한국에서 갭이어를 한다는 게 독특해 보이네요.

그때 저는 춤추는 게 너무 좋았어요. 필리핀에 있을 때 한국에 있는 스트릿 댄스나, 얼반댄스 씬이 한창 잘하던 시기였어요. 그걸 보면서 '한국에 있는 선생님들 수업 듣고 싶다.' 생각했었고, 한국의 댄스 분야는 어떻게 운영이 되고 이루어지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걸 배워보고 싶어서 한국으로 갭이어를 온 거고, 실제로 선생님들 수업을 듣기도 하고, 댄스 학원 매니저로 일하면서 어떻게 운영이 되는지를 많이 배웠어요. 저한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싶었는데, 그런 경험을 해서 좋았어요.


갭이어를 하다가 어떻게 프렌토로 함께 하시게 됐나요?

당시 미디어 컨퍼런스에 다녀온 후에, 유스보이스와 연이 계속 닿아있었어요. SNS를 통해서 주로 소식을 접했는데, 그때 마침 프렌토 18기 모집 공고가 떴고, 해봐야지 해서 지원했었어요. 당시만 해도, 프렌토가 뭐 하는 거다 하는 감은 없었고, 그냥 미디어 컨퍼런스 같은 건데 6개월 동안 주기적으로 만나는 활동이 아닐까? 싶었어요.



프렌토를 하시며 만든 대표작들이 있었어요. 그중 하나가 '불편하신가요?'라는 콘텐츠인데, 소개 부탁드려요.

'불편하신가요?'는 제가 불편해서 만들었어요. 한국에서 대안학교를 다녔는데, 생각해보면 중학교 때부터 비주류의 삶을 선택한 거예요. 공교육을 안 받고, 수능도 안 보고, 공부하는 세상에 살지 않겠다 한 거예요. 대안학교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았고, 관심도 불편하고 열등감이 있었어요.

또 학교에서도 불편한 게 있었어요. 미디어 컨퍼런스에서 잡지 만들 때, 보여지는 거, 옷 입는 거로 만들었듯이 저는 제가 좋아하는 옷 입는 걸 좋아했어요. 대안학교는 교복이 없으니까, 제가 입고 싶은 걸 다 입었어요. 그런데, 윗 기수 오빠들이랑 여자 선생님들이 옷 단속을 심하게 했어요.


"네가 그렇게 입고 다니면 불편하지 않느냐, 네가 조금 단정하게 입었으면 좋겠다."라면서요. 

저는 이게 잘못된 일인가 싶었어요. 내가 입고 싶은 거 입는 건데, 내 잘못으로 몰아가고. 그런 불편함 들이 쌓이고, "네가 뭔데"라고 말하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어떻게 표현할지도 몰랐고, 왜 불편한지도 모르고, 막연하게 불편했어요. 근데 설명은 못하겠고. 답답했어요. 


그러다 프렌토 활동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던졌는데, 그걸 콘텐츠로 만들어보자고 해서 만들게 됐어요. 당시 노브라를 콘텐츠로 했는데, 브라를 입느냐 안 입느냐를 상징적으로 해서, 내가 사회의 시선을 벗어던진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어요.


불편하신가요?. 정혜란 프렌토 18기 제작.


콘텐츠를 만들고 난 뒤, 불편함이 조금 풀렸나요?

'불편하신가요?'를 하면서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싶었어요. 내가 어떤 점이 불편한지와 내 불편을 어떻게 표현해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지 알게 된 것 같아요. 말을 해서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보는 게 이해하기 편한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불편한 점과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당시 혜란님이 가진 불편함을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었나요?

당시 영상을 만들고 난 다음에, 브라 안 입으면 어때 하고 안 입고 다녔어요. 제 친구들이 그런 저를 보고 "너 멋지다.", "너를 보면 브라 안 입어도 될 것 같아.", "너를 만날 때는 브라 안 입어도 될 것 같아."라고 해주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좋았어요. "나도 그때 선배 기수 오빠들이 그러는 거 불편했다, 나한테도 여자 선생님들이 그랬다."라고 말하더라고요. "나는 네가 이런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말해줘서 너무 좋아." 그렇게 얘기하는데, 공감해주는구나, 내가 다른 친구들 속에 있던 목소리까지 꺼낼 수 있었구나 싶었어요.


불편하신가요?, 정혜란 프렌토 18기 제작


현타쉐어 중.


현타쉐어는 어떻게 하게 됐어요?

현타쉐어는 당시 제가 현타가 와 있었어요. 나는 왜 대학에 가야 하고, 안 가도 되는가에 대해서. 갭이어를 하면서 한국에 있는데, 제 또래 친구들은 다 대학교 1학년이었거든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대학교 ~과를 공부하는 누구다.'라고 하는데, 저는 그 앞에 타이틀이 없는 거죠. 그게 불안했어요.


'나는 왜 없을까?', '나는 없어도 될까?', '만약 한국에 정착할 거라면, 그게 없어도 되는 걸까?'에 대한 불안감이 아주 컸어요. 이런 고민을 밖으로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안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라면서 불안해했었어요. 대학은 소속감도 주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아 이런 걸 하는 사람이구나' 알 수 있는 거잖아요? 달리 보면 다를 표현하는 방법인 건데, 그런 게 없으니까 불안했고, 이런 고민을 나만 하고 있는 걸까 싶어서 현타쉐어를 하게 됐어요.




진행하니 소감은 어땠어요?

끝나고 나서, 나만 이런 현타가 있는 건 아니구나, 다른 사람도 똑같구나를 알아서 좋았어요. 나만 혼자 이상한 사람 같고, 고민하고, 불안하고, 열등감 있는 게 아니구나. 대학에 가도 있고, 안 가도 있고, 다들 자기만의 현타가 있구나 알게 됐어요. 그런 걸 속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힘들지만, 공유해서 좋았고, 고민을 나눴다는 것 자체로 힘을 얻는 것 같았어요.


현타쉐어 중


대안학교 외에 공교육을 받던 청소년과 활동하니 어떠셨어요?

그전까진 외계인 보듯이 저랑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근데 막상 만나보니까, 비슷한 고민과 생각을 하더라고요. 학교의 결만 다르지 비슷하구나 느꼈어요. 대안학교에 가서 열등감이 있다고 생각했고, 공교육 학생들에 비해 공부를 할 줄 모르니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싶었는데, 프렌토를 하면서 같이 활동하고 이야기하니까, 다들 나랑 비슷하구나, 나도 정상인이구나 라는 위안을 받았어요.


그 활동들이 혜란님께 어떤 영향을 줬나요?

나도 정상이고 동일한 사람이구나를 스스로 받아들인 것 같아서 좋았어요. 계속 만날 수 있는 친구도 생기고. 학교 밖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게 크게 와닿았어요. 또 유스보이스를 통해 '불편하신가요?'와 '현타쉐어'를 하면서 내 불편함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저만의 언어가 생긴 것 같아서 좋았어요.


생각해보면 그때가 시작이었어요. 내가 부당함을 못 참는 사람임을 알고, 표출한 게. 이전에는 나 혼자 꽁해서 화가 쌓였는데, 유스보이스 이후 나도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공감하도록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 그래서 좋은 트레이닝이 됐다고 생각해요. 계기를 마련해 준 거니까.



유스보이스 이후의 예가 있을까요?

미국에 와서 인류학을 공부하며 대학교를 다니고 있어요. 인류학은 편입으로 학과를 바꾸면서 배우게 됐고, 그 전에는 다른 학교에서 영화 제작을 공부했어요. 편입 전 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일을 했어요. 외국인 학생은 비자에 취업 관련 제약이 많은데, 학교 안에서만 주 20시간 이내로 일할 수 있어요. 학교 식당에서 일했는데, 시급 문제가 있었어요.


일 시작하는 첫날이었는데, 그때 돼서야 학교에서 주는 시급이 학교가 속한 시의 노동법보다 최저시급을 낮게 준다는 걸 알았어요. 그전에는 얘기를 안 했어요. 그때 들었던 생각이 '이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밖에서 일하지 못하는 처지를 이용한 거다.'는 생각이었어요. 왜냐하면 일하는 친구들은 외국인밖에 없었고, 사실 미국 시민권자가 학교에서 주는 시급을 받고 일하지 않거든요. 우리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걸 이용해서, 저임금으로 노동을 시킨다, 이건 아주 잘못됐다, 생각해서 이걸 해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어떻게 진행됐나요?

시급이 낮다는 걸 알고, 제 보스를 찾아갔어요. "부당 임금 주는 거 아니냐, 시의 최저시급이 있고, 이 기관은 시 안에 있는 건데, 그러면 시의 노동법을 따라야 되는 거 아니냐."라고 물어봤어요. 답변이 "우리 학교는 공립학교라 캘리포니아 주의 법을 따른다"였어요. 이게 교묘하게 피해 가는 거예요. 보통은 그렇게 안 해요. 기관이 속한 시의 법을 따르지.


해당 답변을 듣고 학교에서 노동법 관련 일을 하시는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그 말을 들으시고, 진짜로 있는 일이냐, 우리 학교에 그런 일이 있냐며 놀라시면서 "이건 부당한 거다, 말도 안 되는 거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잘못된 게 맞는구나 확신이 생겨서, 그 뒤로 조치를 취했어요.


학교 학생회랑 연락하고, 학교 교내 신문사에 연락해서 이 문제가 관심받도록 했어요. 같이 일하는 친구들과도 이야기하고, 도움도 받고. 한 번은 1년에 한 번 하는 총 학교 임원 미팅에 가서 "당신들 이러면 안 된다."라고 발언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말했어요. 그때 다들 충격받은 것 같았어요. 아예 몰랐던 것 같아요.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거기서 일하는 사람이 아시아계가 많아요. 그래서 어찌 되었던 저임금을 줘도 모국보다 많이 받는 거예요. 그래서 불만은 없었어요. 제가 “이거 부당한 거다. 제대로 받아야 한다. 우리 권리다.”라고 이야기하니까 “어, 나는 괜찮아”라고 해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함께 해야 하는데, 참여를 안 하니까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제 편에 서준 교수님도 많았고,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학교 다니면서 이 문제를 크게 이야기하고, 졸업을 하고 편입을 했어요. 졸업한 뒤에도 당시 학생회 친구들과 꾸준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다행히 임기가 끝나기 전에 학교 측과 미팅을 해서 2020년 8월부터 시의 최저임금을 받게 됐더라고요. 다행이었어요.


결과는 잘됐지만, 활동하면서 무섭진 않았나요?

너무 무서웠던 게, 한 번은 학교의 높은 직급의 분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어요. 좋은 기회다 싶어서 갔는데, 그분이 "네가 돈 많이 못 받는 게 아쉬운 거면, 너 돈 많이 받는 곳으로 옮겨줄게." 이러는 거예요. 어찌 보면 뇌물이죠. 안된다고 했어요.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다고. 그러고 나왔는데, 너무 불안한 거예요. 잘리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도 들고. 그때가 제일 무서웠어요. 그래도 뭐 잘 해결됐으니 다행이죠.



앞으로의 유스보이스는 어떤 걸 집중해야 할까요?

유스보이스의 목소리가 청소년의 목소리보다 커선 안된다고 생각해요. 청소년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 수 있고, 잘 말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좋겠어요. 단체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청소년이 '이건 내가 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활동이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지원해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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