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CHRISTMAS
나는 왜 이렇게 크리스마스를 좋아할까? 생일보다 훨씬 훨씬 더 좋다. 1년에 딱 하루뿐이지만 다행히도 유난 떠는 건 나뿐이 아니라 11월 말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슬슬 만들어진다. 12월부턴 본격적이다. 추위에 치를 떠는 나지만 크리스마스 덕분에 연말은 늘 설레고 행복하다. 유튜브에서 온갖 캐럴 플리를 찾아 듣는다. 그럼 행복감이 두 배다. 종교도 없고 산타도 이제 믿지 않는데 왜 이렇게나 좋을까. 11월 말을 맞아 슬그머니 카카오톡과 업무 메신저의 프로필과 배경 사진도 크리스마스의 것으로 바꾼다. 지금 이 글도 캐럴을 들으며 쓴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누적돼 온, 그래서 몸에 새겨진 겹겹의 추억 덕분이 아닐까. 어떤 기억들이 있을까. 기억 저편에 있던 조각들을 꺼내 모아 보자.
초등학교 5학년 크리스마스이브, 삼총사끼리 친구네 모여 파자마 파티를 열었다. 그 집은 조금 넓었고 왜인지 아버지는 계시지 않았고 어머니도 종일 밖에 계셨다. 어머니가 귀가하시고도 집이 넓어 마주칠 일이 없어 마치 셋만 있는 기분이었다. 무얼 하고 놀았는지는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파자마를 입고 불을 끄고 간접등을 켜고 케이크를 나눠 먹고. 그런데 그게 뭔가 세련된 놀이 같았다. 크리스마스,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하는) 여자 셋, 예쁜 파자마? 못 참지. 그러다 까무룩 잠들었는데 아침 서늘한 기운에 눈을 뜨고 차가운 마루 바닥을 맨발로 몇 발 디디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모습을 삼총사가 함께 봤다. 눈이 흔하지 않던 도시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정말 선물 같던 날이다. 이때쯤 한참 나모 웹에디터나 하이홈 같은 플랫폼에서 홈페이지 만들기, 포토샵으로 축전 만들기 같은 것이 유행했는데 나는 꼭 크리스마스만 되면 인터넷에서 크리스마스트리 옆 눈이 소복이 쌓인 오두막 같은 - 마치 지금 브런치의 표지와 비슷한 - 서양풍(?)의 무료 크리스마스 이미지를 찾아 반짝이와 눈 내리는 효과를 입히며 놀곤 했다. 열심히 만든 이미지로 컴퓨터 바탕화면을 바꾸는 게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어떤 크리스마스부턴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동생의 동심을 지켜 주기 위해 공범이 되는 첫째의 도리를 하겠다는 명목으로 나도 산타에게 우겨 선물을 받았다. 동생의 동심을 위해 크리스마스이브엔 함께 안방 침대 아래 바닥에서 잤는데, 뜨끈한 이불 안에서 동생을 밀치고 일어나면 머리맡에 해리포터 불사조 기사단 5권 전권이 놓여 있었다. 다음다음 해는 혼혈왕자 전권이었다. 지금도 크리스마스가 오면 해리포터 영화를 본다. 생각해 보면 종교도 없는데 부모님은 꽤 진심으로 크리스마스를 챙겼다. 산타가 선물을 주었다고 꾸몄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평소엔 절대 먹지 않는 피자나 햄버거 같은 서양풍(?)의 외부 음식을 먹게 해 주었다.
어떤 크리스마스에서는 다니던 영어 학원에서 파티가 열렸고 어떤 크리스마스엔 나 홀로 집에를 처음 봤다(이후 나 홀로 집에 시리즈를 개봉할 때마다 챙겨 보고 본 걸 또 보고 게임까지 하는 어린이가 됐다). 또 어떤 크리스마스엔 스무 살이 된 기념으로 고향 친구들과 서울 명동으로 나가 거대한 트리의 따뜻한 불빛을 구경했다. 어떤 크리스마스엔 연애를 하지 않던 친구들끼리 모여 갑자기 찾아올 사랑을 꿈꾸며 술을 마셨다. 어떤 크리스마스에는 20대의 첫 남자친구가 생겼다. 어떤 크리스마스는 집에 틀어 박혀 하루 종일 번역 아르바이트만 했지만 곧 더운 나라로 떠날 배낭여행을 기대하며 행복해했다. 또 어떤 크리스마스엔 집에서 해리포터 영화를 며칠 동안 꼼짝 않고 정주행 했고 또 어떤 크리스마스엔 스웨덴 집 곳곳에 달린 별 조명을 구경했고 영국과 프랑스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본 사람들과 와인을 마시며 보냈다. 또 어떤 크리스마스엔 온갖 크리스마스 영화를 몰아 봤다.
돌이켜보면 모든 크리스마스가 행복했다. 크리스마스 당일뿐 아니라 그전 날인 이브도, 그 전의 몇 주도 모두 행복했다. 지금도 행복하다. 이렇게나 많은 캐럴이 모두 좋고 그런데 아직도 캐럴이 나온다는 게, 앞으로도 나올 거라는 게 더 행복하게 한다. 지금 흘러나오는 아리아나 그란데의 santa tell me는 2014년 노래로 비교적 최근에 나온 캐럴인데 어째서 이렇게 좋은 캐럴이 최근에도 계속 나온단 말인가! 아직도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의 전주, 똥똥똥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뛴다. 서방 국가의 문화 이데올로기 주입이 단단히 됐대도 상관없다. 기독교의 문화 프로파간다에 지배당했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저 나는 행복할 뿐이다! 길거리에 캐럴이 울려 퍼지고 따뜻한 불빛과 조명이 걸리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조금 마음이 따뜻해지고 서로를 조금 더 보살필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조금 더 행복하게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면.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또 뭘 볼까! 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