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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Mar 07. 2024

끔찍한 일태기를 극복한 의외의 방법

어쩌면 경지에 도달한 걸지도?

아 최근 정말 끔찍한 일태기를 겪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한없이 사소해 보이고 무가치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실제로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이 안 하면 큰일 나지만 해도 성과를 내기보단 루틴한 일에 가깝다. 자꾸만 무가치한 일을 하는 내가 무가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의미를 찾지 못하니 일이 더 재미없어지고 회사 가기가 싫어진다. 무가치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설령 무가치하다고 느끼더라도 내가 하는 일엔 그렇지 않은 일들도 분명 있는데도 쪼그라든 마음을 펴내기 쉽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이 없으니 회사 내 쓰임과 쓸모로까지 생각이 뻗는다. 위험한 신호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대단한 성과를 내고 있느냐. 이에 대해선 의견이 모두 다르겠으나 나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쪼그라들고 또 쪼그라들었다. 물에 잠긴 기분이었다. 숨을 못 쉰 채 겨우 수면 위로 입만 벙긋거리면서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으며 목구멍으로 물이 울컥 차오르는 그런 기분.


이직도 답이 될 거 같진 않았다. 이도저도 못하며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기분을 느끼며 좌절감만 커져갔다. 침대에 누우면 온통 회사 가기 싫다는 생각만 떠오르고 아침에 모닝콜을 들어도 끄고 다시 눕는 일이 허다했다. 회사를 가는 게 너무 끔찍하고 그냥 하루종일 누워 놀고만 싶었다. 회사에서 가장 일찍 출근하는 편이었던 내가 이제는 10시, 늦으면 11시에도 출근하고 엉덩이를 계속 들썩 거리며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하려 기를 썼다. 일을 시작하기 싫어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싶었고 대충 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이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지니 우울증을 의심하기까지 했으나 일만 빼면 나는 너무 행복하고 안정된 기분이다.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자꾸 부유하고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힌다. 자꾸만 복기하는 습관. 하지만 나는 이제 알지. 스트레스와 걱정은 불안과 선 하나 차이다. 불안도 습관의 산물이다. 나를 지켜야 하니까. 결국 얼마 전 결단을 내린다.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제껏 열심히 일 했으니 이런 시기도 있는 거겠지 하며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일할 때도, 자기 전에도, 눈을 떠서도, 출근길에서도, 출근해서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일이 의미가 있는지, 내가 무가치한지 아닌지, 일이 재미있는지, 왜 재미없는지 따위를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예전엔 퇴근 후 온오프 스위치를 켜고 내리는 걸 연습했는데, 요즘엔 어지간히 스트레스였는지 몸이 알아서 끊어낸다. 이젠 일 생각을 하려 해도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흘렀다. 꽤나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물론 이랬다고 갑자기 일이 재밌어졌다거나 갑자기 나 스스로가 가치 있게 느껴졌다거나 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일에 의미 부여하는 일을 멈추고 부정적인 평가와 생각을 끊어냈더니 역설적으로 일을 그냥 하게 됐다. 아무 생각 없이 기상해 아무 생각 없이 출근했고 아무 생각 없이 책상에 앉아 해야 할 일들을 리스트업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했다. 퇴근 후에도 역시 일과 나에 대한 평가와 복기를 하지 않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오프 타임에 충실했다.


그랬더니 아무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하기 싫다는 부정적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일은 전보다 더 많이 잘 해내고 있다. 여전히 재미는 없지만 재미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어쨌거나 해야 할 일들이 있고 태스크라는 것, 그 태스크를 위해 프로세스를 짜고 그걸 해내고 결과를 보고 다시 피드백하고 개선해 나가는 그런 일련의 과정은 재밌으니까. 목표를 세우고 일이 되게 만드는 건 재밌으니까. 그랬더니 일을 더 많이, 잘하게 됐다. 몇 달 전만 해도 일퇴를 하려 기를 썼는데, 생각을 멈추고 일을 많이 벌리니 요 며칠은 야근까지 하게 됐다. 그런데 스트레스가 없다.


어쩌면 너무 잘하려는 마음, 너무 일에서 재미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 너무 일과 나를 동일시하는 그런 마음 때문에 지쳐 버린 게 아닐까. 20대 때 한참 일하는 나에 빠져 있던 시절의 생각 - 직장인처럼 일하긴 싫다 -던 그 말이 얼마나 건방졌던 말인지 새삼 깨닫는다. 비로소 직장인의 경지에 다다라 비로소 진정한 직장인처럼 일하고 있다. 하루의 대부분이 일에 쓰이고 내가 일이라는 걸 좋아하는 만큼, 특히나 재미와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 직업을 정한 만큼 그것은 여전히 나에게 유효할 테다. 그렇지만 오히려 때로는 좋아하는 것들과 거리를 둘 필요도 있는 게 아닐까. 더 오래, 더 재밌고 더 가치롭게, 그리고 더 건강하게 일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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