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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Apr 28. 2024

영상을 넘어 활자로 도망친 32세 젊은이

윤석열 나이로.

메모장 최상단에는 늘 같은 메모가 고정돼 있다. 2024 영화 시리즈.


지난해엔 2023 영화 시리즈였고 그전엔 2022 영화 시리즈였다. 매년 본 영화와 시리즈/드라마를 기록하고 연말에 정산해 본다. 올핸 몇 편이나 보았는지, 그중 베스트 3가 무엇인지, 이런 것들. 나름의 이유들을 요리조리 붙여 가며 항목별로 베스트를 꼽아보기도 했다. 영상 창작자이기도 했으므로 영상물에 기본적으로 관심과 흥미가 높았고 인풋이 필요하기도 했다. 또 영화 시리즈 팟캐스트 창작자이기도 했으므로 최신작을 열심히 따라가야만 했다. 그래서 매년 평균적으로 100편이 넘는 영화 시리즈를 보곤 했다.


2024 영화 시리즈를 열어 본다. 언제 마지막으로 기록한 거지? 기억도 안 난다. 중간에 누락된 게 있을 거 같은데... 싶을 정도로 숫자가 처참하다. 무려 14편. 지금이 4월 말인데? 보통 같으면 적어도 40편, 많으면 50편도 봐야 할 시점에 고작 열네 편이라니.


실은 영상을 만들지 않은 지 꽤 오래됐고 스스로 영상 창작자라는 인지도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다. 게다가 근 몇 년 사이 유튜브와 특히 짧은 영상 콘텐츠들이 폭발적으로 생성되면서 영상에 대한 피로함 마저 느끼게 됐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들어오는 탓이다. 유튜브를 큰 tv로 보는 시대의 유튜브 콘텐츠는 그저 방송국이 주도하던 tv 콘텐츠를 새로운 플랫폼으로 옮겨온 것과 다름없다. 생각해 보면 원래도 나는 tv를 잘 보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세상이 소란스럽다고 느꼈다. 휴대폰 화면도 소란스럽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비활성화하고 유튜브 앱을 잘 켜지 않는다. 릴스든 쇼츠든 잘 보지 않는다. 그래도 콘텐츠 제작하는 사람인데 이래도 되나? 여하튼 내가 시끄러운 게 싫다. 그랬더니 잘 만들어진 장편 영화나 시리즈도 손이 선뜻 가지 않는다.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아침, 집구석구석 청소하고 깨끗하게 씻고 소파에 널브러져 ott 리모컨을 켜는, 매번 하는 루틴임에도 늘 설레던 그 감각도 사라진 지 오래다.


대신 책을 집어 든다. 소란함이 싫어 활자로 도망쳤다. 그랬더니 요즘 책을 그렇게 읽는다. 활자는 조용하다. 소설의 장면 장면도 내 머릿속에서 조용히 재생된다. 그것도 오로지 내 의지에 의해서만.


물론 소란스러움만이 이유는 아니다. 거의 3달 가까이 꽤 빡센 글쓰기 외주를 하느라 매일 퇴근하고 방에 처박혀 글만 썼던 탓에 다른 걸 할 에너지도 고갈됐다. 그 외 시간엔 조금 남은 에너지로 겨우겨우 운동만 했으므로. 또 다른 이유는 이제 ott에 올라온 콘텐츠들 소개만 봐도 무언가 ott맛이 느껴지는 기분 탓 때문에도. 비슷비슷한 플로우와 비슷비슷한 컨셉. 보고 나면 시간은 잘 때웠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때울 시간 따윈 없이 소중한 시간만 있는 바쁜 현생이라는 것. 그래서 그 시간이 아까워지는, 나만 그래? 또 또 다른 이유는 아무래도 높게 오른 영화표 값. 심심하면 영화관을 가던 나도 이제는 듄 2 같은 ‘반드시 영화관에서 봐야만 한다’는 대작이 있을 때만 가게 된다.


그래서 올해는 과연 몇 편이나 보게 될까. 지금 페이스대로라면 50편만 봐도 선방일 거 같다.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을 정리해 본다. 소란스러움 말고, ott맛 ott 말고, 도파민만 있는 유해함 말고, 아직 내가 보지 않은 수많은 걸작들이 있으니까. 잘 만든 영상 콘텐츠로 다시 영상에 대한 애정을 키우고 좋은 에너지를 받고 싶다. 자, 그래서 오늘은 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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