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현중쌤!" "조교님!"
근 1달 만에 찾아간 영어학원에서 아무생각 없이 있다가 들은 저 말들이 오래도록 여운이 남아,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글을 쓴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제대로 된 꿈이 없었다. 유치원 때 이동국 선수를 보고 축구선수가 하고 싶었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 임요환, 홍진호 선수를 보면서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중학교 때는 판검사가 되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때 외국어 고등학교 진학 준비를 하면서부터 공부에만 집중해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꿈이 뭔지 제대로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처음 꾼 진지한 꿈: 영어 강사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내가 아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같이 성장해 나갈 때 즐거움을 느낀다는 걸 알았고, 스타강사들의 인터넷강의를 들으면서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종합학원을 다니는 것보다 저렴했고 양질의 내용으로 성적 향상에도 도움이 됐으며 강사들이 중간 중간 의욕을 북돋아주었던 게 힘든 수험생활을 견뎌내는데 큰 힘이 되었다. 거창하지만 이 때 나는 '교육'에서 세상을 밝힐 수 있는 힘을 느꼈다. 교육자가 되어 나로 인해 누군가가 희망을 얻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막연히 ‘강사’라는 꿈을 품었고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영어’를 택했다.
그런데 대학갈 때가 되니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무슨 영어를 가르쳐...’라는 생각으로 목적 없이(취업이 잘된다해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즐겁게 배웠고 특히 HR 쪽을 더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어교육은 중학생 과외 1년, 봉사활동으로 고등학생들을 40시간 정도 가르쳤던 게 전부였다. 어느 순간부터 경영 쪽이 내 길인가보다 하고 걸었다. 영어는 나름의 취미로 두고..
그로부터 2년 반 정도 뒤, 군에서 전역을 몇 달 앞두고 진로와 적성에 대해서 깊이 고민할 때가 있었다. 그 때 영어 강사라는 꿈이 다시 나를 불렀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뛰어 어느 날은 잠들기 어렵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공부를 시작해 Grammar Map이라는 나름의 커리큘럼도 구성했다. 하지만 전역하고 보니 현실은 만만치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 길은 터무니없는 것 같았고 다들 기업체에 들어갈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스펙을 쌓았다. 결국, 대학교 입학할 때와 똑같아졌다.
스펙의 일환으로 영미권 교환학생 준비를 했고 15년 10월부터 영어스피킹 실력을 늘리기 위해 J Life School이라는 학원에 다녔다. 랜디 포시의 ‘마지막 강의’로 수업을 하는 스피치반을 들었는데 “You might as well be selling something worthwhile like education.”이라는 내용이 꼭 나한테 하는 말 같았다.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고 마지막 날 발표에서 영어 강사가 되고 싶고 조만간 스터디를 열겠다고 공표해버렸다. 3개월 뒤, 군에서 준비한 Grammar Map을 기반으로 많이 부족하지만 Grammar Compass라는 문법 스터디를 열었다. 정말 마지막 기회라 생각해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이 때가 아니면 다음은 없을 것 같았다. 2009년부터 펼쳤다 접었다를 수없이 반복하던 그 꿈을 2016년이 돼서야... 7년 만에 실천에 옮겼다. 참 오래 걸렸다.
스터디: Grammar Compass (1~4월)
GC 1기라는 이름으로 1월부터 2달간 수업했다. 알고 지내던 다섯 분이 수업을 들었다. 주2회 2시간씩 하는데 교재, PPT 준비, 강의 리허설 등에 과장을 보태면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그럼에도 죄송할 정도로 많이 부족했던 2달이었다. 그리고 3월에 2기를 열었다. 이번에도 지인들로 여섯 분이 모였다. 1기를 했던 경험으로 보완, 수정해서 더 좋은 수업을 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뭐라고 스승의 날에는 케잌이랑 꽃도 받았다. 실력이 늘었다, 도움이 됐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했다. 밤샘을 못하는 내가 수업 준비를 할 때면 즐거워서 잠도 자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마냥 즐겁게 열심히 수업을 하다보니 GC 2기가 끝날 무렵, 아예 모르는 분들로부터 GC 3기에 대한 문의가 왔다. 정말 정말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당시에 GC 내용과 방식을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2기를 마지막으로 GC는 하지 않았다.
스터디: 숙제끝 (5~6월)
스터디와 동시에 학원의 대표 수업인 ‘국민영어법’(Level 1)을 공부했다. 1~2월은 인강으로 독학했고 기회를 얻어 3월부터는 조교로 수업에 참여했다. GC는 학교 정규교육과정에서 배우는 전형적인 영문법이었는데, 이와 달리 국민영어법에서 쉽고 재밌게 가르치는 혁신적인 방법을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GC 3기를 안하게 된 결정적 이유) 그래서 나도 더 성장하고 무엇보다 국민영어법 학생들이 수업 내용을 흡수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5월부터 국민영어법 After스터디를 열었다. 오픈스터디 형식이라 매일 매일 참여하시는 분들이 달랐고 99% 처음 뵙는 분들이어서 GC할 때보다 훨씬 긴장했다. 30~40분이란 짧은 시간에 당일 수업 내용을 복습하고 +α까지 드리려하니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할수록 나아졌고 고정멤버가 어느 정도 생겨서 자신감 있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6월엔 매일 참여인원이 늘어났고 반응도 기대 이상으로 좋아 내내 기분 좋게 했다. 수업 외에 카톡으로 질문이 오면 답변 드리는 게 즐거웠고 짧은 지식에 더 많이 알려드리지 못해 미안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고 그렇게 6월을 마지막으로 스터디, 조교 활동을 마쳤다. 9월 출국인 교환학생 지원, 서류 준비와 같은 것들이 그때 당시엔 너무 커보였기 때문에.... 아무튼, 종강할 때마다 항상 느꼈던 아쉬움이 6월엔 마지막이라 그런지 더 컸다. 전해 듣기에는 7월에 스터디가 없어서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부족했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괜찮았나보다. 다행이다.’하는 생각으로 가끔씩 그때를 회상하면서 보냈다.
그리고 오늘, 약속이 있어 엄청 오랜만에 학원에 갔다. 로비에서 휴대폰을 하면서 앉아있었는데, 같이 스터디를 하셨던 분들이 로비에 있는 나를 반겨주셨다. ‘현중쌤’과 ‘조교님’이라는 호칭을 근 2달 만에 들으니 간만에 삶에 활력이 생기는 것 같았다. 서로 안부를 물었고 내 수업을 정말 좋아해주셨구나 하는 걸 어렴풋이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했고 강단이 그리워졌다. 집에 와서 6개월 동안 진행한 스터디의 교재와 수업자료들을 열어보고 학생들이 보내주신 후기들, 같이 찍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다시 봤다. 그래도 마음에 울림이 남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9월 8일 영국 뉴캐슬로 두 학기동안 교환학생을 가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진짜 멋진, 지식도 컨텐츠도 경험도 빵빵한 선생님이 돼서 돌아와야지.
아무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다보니 주변 친구들은 CPA, CFA, FRM, 공인노무사 등 내로라하는 전문 자격증을 땄거나 준비 중이고, 선배들은 우리가 흔히 대기업이라고 하는 기업들에 취직해 자리를 잡고 있다.
나도 그렇게 해야할 것 같아서 한동안 취업 준비를 했다. 자격증을 땄고 영어 실력을 높였다. 스펙을 쌓았다.
결국 돌고 돌고 돌고 또 돌아 마침내 다시 영어 강사의 길로 돌아왔고, 이제서야 제대로 된 첫 발을 내딛고 있다.
주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다르고 낯선 길이며 꿈이다.
하지만 어떤 길을 걷든지 그 길의 옳고 그름은 그 누구도 결정할 수 없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어떠한 직업을 갖고 얼마의 연봉을 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 때문에
대기업 입사를 꿈이자 목표로 생각했으며, 그동안 내가 생각해온 그 간절한 꿈을 펼치지 못해왔다.
간단히 말하면, 남들이 세운 기준에 내 삶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했던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인데, 그럴 필요가 뭐가 있을까?
항상 기억하자.
아무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
2016.08.19.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