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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Jun 07. 2020

'질문력' 잔혹사는 팀킬로 시작되었다

평화학 렌즈로 바라보는 교실

한국 사람들질문 못 하기로 소문났다. 하지만 '내가 진짜 질문력이 부족하구나' 하고 절실히 깨달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질문 못하는 사람들로 꽉 찬 공동체 안에 있으면 그게 디폴트 값이 되는 법. 쓸데없이 질문했다간 나댄다는 소릴 들을 수 있으니 그저 가만히 있다가 가마니가 었다는 슬픈 전설...


그래도 나는 질문을 많이 하는 편에 속했다. 질문하는 건 늘 긴장되는 일이었지만 말이 많고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 긴장감을 앞섰다. 그런데 문제의 잔혹사(?)가 발생한 뒤 나에게 질문은 난제가 아니라 공포가 되었다.


그때 있었던 강의실과 가장 비슷한 사진. 사진만 봐도 화가 날 정도로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정확히 어떤 강의 시간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평소처럼 질의응답 시간에 궁금한 걸 질문했다. 어떤 질문이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다만 또렷하게 생각나는 건 내 다음 차례에 질문했던 어느 남학생의 첨언이었다.


"방금 나온 건 정말 쓸데없는 질문이었던 것 같고요. 제 질문은..."


거울을 보지는 않았지만 살면서 그때처럼 내 얼굴이 붉어진 때는 손에 꼽을 것이다. 너무 수치스러워서 그냥 그대로 짐을 싸 집에 가버리고 싶었다. 나중엔 화가 났다.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질문을 했다고 비난한 남학생이 미웠고,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 교수님도 원망스러웠다. 자유롭게 질문할 환경도 만들어주지 않으면서 왜 우리 보고 질문하지 않는다며 한탄하신 걸까? 많은 교사가 질문이 많은 교실을 바라지만, 멍석을 잘 깔아주고 질문하라고 하던지 해야 할 것 아닌가. 끊임없이 질문하는 아이에게 '조용히 해'라고 말하는 것이 익숙하고, 교사의 기준에 맞지 않는 내용을 질문하면 면박을 주는 교육현장 속에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질문=껄끄러운 것'이라는 공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교사 또는 강사의 우월한 지식과 말이 폭우와 홍수처럼 들이닥치는 상황은 하늘에서 무자비하게 투하되는 폭격의 상황과 닮아 있습니다. (…) 이렇게 학습자의 상황이나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지식의 폭력은 후유증을 가져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배움의 과정에서 나의 호기심과 생각, 내 동기와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함으로써 무언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무너져버리고 전문가로 상징되는 교육자 앞에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대신 지식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망설임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배우는 P.E.A.C.E. 페다고지 평화교육』, 민(2016), 이대훈, p.14


피를 봐야만 폭력이 아니다. 언어적, 심리적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폭력이다. 더 넓게는 누군가가 자신이 가진 힘으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도 폭력이다. 그래서 평화학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책상 줄 맞춰라'라고 하는 것도 폭력이라고 본다.


평화학을 공부하면서 그날 내게 벌어진 일이 폭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질문할 자유를 짓밟는 폭력. 더 잔인한 것은 그것이 완벽한 팀킬이었다는 점이다. 차라리 교수님께서 나를 질책하셨다면 '선생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며 흉이라도 봤겠지만, 같은 처지에 있던 학생에게 그런 비난을 받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내 질문을 조롱한 그도 누군가가 질문은 유식하게(혹은 그래 보이게) 해야 한다고, 쓸데없는 호기심은 죽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었을 것이고, 그의 잘못이 있다면 그 가르침을 매우 성실하게 받아들였다는 점뿐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질문하고 싶을 때마다 '질문하면 혼날걸?’', '쓸데없는 말 해서 사람 귀찮게 하지 마' 같은 에고의 비웃음에 기가 죽었다. 하지만 혼나더라도 속 시원하게 물어보겠다는 용기로 두려움을 넘어섰을 때, 그리고 질문해도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경험이 수차례 누적되면서 조금씩 회복됐다. 물론 아직도 질문하는 것은 두렵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래도 질문하니 속 시원하더라. 혼나더라도 못난 사람이 되는 건 상대방이더라. 그러니까 눈 딱 감고 한 번만 시도해보라. 질문을 공포스러워하는 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는 이 정도뿐이라는 게 안타깝다.


이런 과정을 통해 느낀 건 나를 질문하지 못하게 한 것도 사람, 내게 다시 질문할 용기를 심어준 것도 사람이라는 점이다. 일상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폭력에 의문을 품는 사람, 어리석은 질문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할 용기를 가진 사람, 그런 사람들이 나를 치유했다. 이런 사람들은 어벤져스처럼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한 사람의 인생은 바꿀 수 있다. 어벤져스가 위기로부터 질문 알레르기로 만연한 세상을 구해준다 한들 알레르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인들은 삶을 제멋대로 가로지르는 세상의 흐름에 새 물꼬를 틂으로써 스스로 변화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에 쓸데없는 질문은 없다. 그리고 나쁜 질문도 없다. 질문하는 건 잘못된 것도 아니고, 튀는 행동도 아니다. 인류가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던 수많은 이유에는 호기심이 있었다는 걸 잊지 말자. 그러니까 누가 질문할 때 '수업 끝나가는데 눈치 없게...'라거나 '관종인가?'라는 생각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뭐 저딴 질문을 해?'라는 말에 '넌 저딴 질문이라도 해봤니?'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도 좀 많아졌으면 한다. 나도 그중 한 명이라면 더욱 좋고. 아직 그만한 용기는 없지만, 나중에 2세가 생길 때쯤엔 어떤 질문이든 훌륭하다고 말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 있었으면 한다.


아, 그건 그렇고 그때 그 남학생한테 한 소리 못 해준 게 참 억울하다. 밥은 잘 먹고 다니시는지? 질문대학 있어빌리티과는 여전히 잘 다니시고? 어차피 한 배를 탄 처지니 그 일은 내 태평양 같은 이해심으로 용서하리다. 인생도 짧은데 질문하는 애들 좀 갸륵하게 봐줍시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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