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 감독 인터뷰 후기.
우리 사이를 스쳐 지나간 바람은 어디서부터 적막함을 가져왔을까. 울고 난 후의 하늘은 이렇게 투명한데.
영화 <너의 이름은.> 의 엔딩곡인 '아무것도 아니야' 의 가사 일부다. 이 그리움에 어떤 것을 덧붙어야 할 지. 너의 이름을 무어라 부를지도 모르는 채로 서로는 감정이 싹트고 관계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의 실체를 탐색하기도 전에 관계는 끝나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영화 <너의 이름은.> 의 주된 내용이다.
감독 신카이 마코토는 이번 영화가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대중적인 영화로 꼽힐 것이라 공언한 바가 있다. 이 예측은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영회 곳곳에는 역시 신카이 마코토야. 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난해함이 있었다. 첫 오프닝부터 마지막 엔딩을 암시하는 장면의 연속이었으니. 감독 스스로가 한번 보면 이해하기 어렵고 네번 쯤 보아야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다 볼 수 있다고 말했을 만큼 영화는 꽤나 난해했다. 영화를 보면 감독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인터뷰 내내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에 답했던 그가 웃었던 순간 중에는 한국 팬들이 자신에게 지어준 별명을 소개하던 때가 있었다. 일명 '커플 브레이커'. 감독의 전작을 본 사람들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조금 달랐다. 그는 인터뷰에서 주인공들의 만남으로 귀결되는 결말은 기획안에서부터 이미 정리된 시나리오라고 했다. 왜 그는 수년간 만들어진 그만의 스타일을 부수면서까지 영화를 만든 것일까.
영화 후반부를 지배하는 정서는 한 시대를 살았던 모두가 잊을 수 없는 재난에 관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2014년 4월의 어느 날을 기억하고 있다. 일본인에게 이는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비극으로 치환된다. 재난 이후 많은 일본인들은 무의식 속에 불안을 가지고 산다. 내가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라는 생각도 그 중 일부다. 예컨데 "만약 내가 지진이 일어나는 곳에 있었다면? "만약 내일 도쿄에 큰 지진이 일어난다면?" 같은 생각들 말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도 예외는 아니다. 건설회사 면접을 보러 간 타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는 도쿄도 언젠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타키는 생각한다. 이토모리 마을이 혜성으로 사라졌듯이 우리가 사는 곳도 어느 순간 사라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원한다. 사라진 것들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 타키가 미츠하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말이다. 수만명이 떠난 비극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빈다.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세상이 조금이나마 좋은 곳으로 바뀌기를. 도쿄에 살며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하기를 즐겨했던 영화감독 신카이 마코토도 그러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스토리는 그렇게 바뀌었고 그만의 진혼곡을 만든다. <너의 이름은.> 의 타키는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 기어이 삶을 획득한다.
물론 영화는 아쉽게도 일본의 고질적인 표현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미츠하라는 점에서 이전의 일본 영화에서보다 조금 나아진 부분이 있었지만 맨 다리를 대놓고 강조하는 장면들에서 눈살을 찌푸린 관객들도 있었다. 감독인 신카이 마코토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리코더 관련 발언 때문에 헨타이 마코토 등의 좋지 않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한 논란 속에서도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작화는 눈부시게 빛난다.
혜성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타키와 미츠하는 이렇게 독백한다. "그날, 별이 무수히 쏟아지던 날. 그것은 마치 꿈속 풍경처럼 그저 한없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순간이 바로 기억해야 할 누군가와의 영원한 이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왜 아름다움 속에서 이별은 일어나는 걸까. 내가 신카이 마코토에게 물은 마지막 질문도 그랬다. 왜 불행을 가져오는 혜성을 아름답게 묘사했는지를 묻는 내 질문에 감독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곤 합니다. 아름다운 산, 호수, 노을 말이지요. 혜성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현상들은 아무런 목적과 의지 없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감독은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타키와 미츠하의 뒤바뀜은 정해진 일이 아닌 그저 우연한 일이었을 뿐이고 그들의 특별한 이어짐 하나, 그것을 정의하기 위해 '무스비' 같은 단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다.
수많은 '무스비' 속에서 주인공들이 그리움을 끝낼 방법은 하나일 것이다. 미츠하와의 잠깐의 재회를 마친 주인공 타키의 독백처럼 말이다.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네가 이 세상 어디에 있건 난 널 만나러 갈 거라고." 영화가 끝나고 어둠이 내려앉은 극장 안에 앉아 있던 관객들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사는 현실에서는 이뤄지지 못한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그들을 우린 응원한다. 빌어본다. 그들이 서로를 기억해 주기를, 서로의 이름을 기억해 주기를, 끝없이, 끝없이 서로의 이름을 묻고 그렇게 서로를 잡기를. 너의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