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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황 Apr 20. 2018

골목길에서.

4월의 어느 새벽에 사람을 구한다는 것에 대하여.

난 새벽의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새벽에 골목길을 걸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고요히 빛나는 어두운 골목길은 어떤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그 긍정적인 예로는 디즈니 랜드가 있다. 여기는 그 완벽한 반대고. 스물하나 건강한 남성인 나도 가끔은 무서울 때가 있다.


여하튼 난 오늘 야참으로 잔치국수와 닭똥집을 먹었다. 배를 든든히 불리고 걷기 시작한 때가 새벽 3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사장님이 주신 콜라 캔을 칙- 까고 갓길을 걸었다. 건너편 갓길 저 멀리서 한 사람이 보였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그 사람을 비췄다. 짧은 스커트를 입은 여자였다. 비틀비틀 걷던 그녀는 차도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 운명은 5분에 한 대 꼴로 오는 차를 때마침 보내줬다. 차와 그녀의 거리가 3미터 남짓 되었을 때, 난 재빨리 반사적으로 뛰어가 그녀를 잡아챘다. 휙. 차는 그녀의 옷깃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고 그녀의 얼굴이 내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아저씨 뭐에요...?"


겁보다는 예상치 못한 놀라움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벌벌 떨던 내 몸이 조금 진정되고 난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많아 봤자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다시 생각해보면 학교 선배일 수도 있겠다. 그녀가 만취했다는 사실은 걸음걸이로 짐작 가능했다. 그녀는 나보다 큰 키에 작은 얼굴을 가졌더라. 그런데도 만취 상태에서 쉽게 잡아챘으니 나보다 가볍다는 거고. 잠깐 완벽한 신체조건을 가진 그녀가 부러워졌다. 내 성장판은 안녕한 걸까. 슬프군. 아, 맞다. 다시 이야기로. 난 내가 아저씨로 불리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먹었다. 그래서 정정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저기요. 전 아저씨가 아니고요, 당신 방금 전에 죽을 뻔 했어요. 당신이 방향 감각 없이 비틀거리며 차도를 지날 때 차가 씽 하고 달려왔다고요.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어요. 근데 이름이 뭐에요?"


만취하신 분이 무슨 헛소리에요? 라는 말이 목까지 나왔다. 하지만 취한 사람에게 내는 화처럼 의미 없는 말은 없기에 몇 번 허허 웃고 가만히 있었다. 힘이 없었다. 옆 건물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도 날 따라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입에서 내뿜어져 나오는 알싸한 알코올 향기가 내 코에 맴돌았다.


"이봐요. 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알아요? 근데 왜 이름도 안 알려줘요? 이름이 뭐에요?"


"중황, 김중황이에요."


"헤헤...주황이구나....주황..,주황색!"


이쯤 되니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진이 쭉 빠졌다. 그래서 그저 맞장구만 쳐 주려 했다. 고개를 끄덕 끄덕. 에휴, 내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는 혼자 가거나 말거나겠지. 그래도 궁금한 건 물어보고 보내주고 싶었다.


"아니, 근데 진짜 죽으려고 했던 거에요?"


그녀는 이미 말한 걸 왜 또 궁금해하냐는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는 술이 깨 보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퍽 듣기 좋았다.


"사실 팍 죽어 버리려고 했어요. 그렇잖아요. 막 술 먹고 차에 치이면 덜 아프지 않을까요? 술 먹고 넘어지면 덜 아프던데. 차로 치이는 거죠. 이번에는."


"저기요. 여긴 차가 그리 빨리 달릴 수 없는 곳이어서 즉사는 어려워요. 기껏해봐야 전신 마비 정도가 고작일 거에요. 그러면 더 끔찍해지겠죠. 그땐 죽고 싶어도 못 죽어요. 저한테 왜 죽고 싶었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요?"


질문을 건내며 속으로 많은 소설을 써냈다. 실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거나, 불우한 환경 속에서 만난 세상이 그녀 뜻대로 되지 않았기에, 심지어 요즘 유행이라는 거대한 음모의 희생양까지. 그 모든 추측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절대 말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말하기 싫다는데 더 추궁해 봤자지. 그녀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비밀을 가지고 있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난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 말을 건냈다.


"이야기 좋아해요?"


"...네..."


"집이 어디에요?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이야기 하면서. 자, 가요."


난 내가 아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부부가 아이를 마트에서 잃어버렸어요. 잠깐 정신을 다른 곳에 둔 사이에요. 그 부부는 오랜 세월 아이를 찾아 다녔고 그때 아이의 손을 놓쳤던 부인은 자책감으로 인해 정신이 이상해졌어요. 그런데 십 년 후에 연락이 왔어요. 고아원에 새로 온 아이들 중 아들과 일치하는 유전자를 가진 아이가 있다고. 알고 보니 유괴범이 자살하기 전까지 그 아이를 키웠던 거였어요. 아이는 지금까지 그 범인을 자신의 엄마로 알고 지내왔고."


"다행이네요."


"그리 다행은 아니었어요. 5살 때 아이랑 15살 난 아이는 겉모습부터 속까지 아주 다르죠. 적어도 부부의 기억 속의 그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어요. 이미 성장이 대부분 완료된 아이에게 진실과 마주하기는 어려운 일이죠. 처음 보는 것 같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기도 뭣할 테고. 엄마의 정신병은 더욱 심해졌고 아이는 겉돌았어요. 아빠는 괴로워 했죠. 더 일찍 찾았으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녀석을 찾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말이죠."


"...슬퍼요."


"슬퍼하긴 일러요. 정신병으로 인한 사고로 엄마는 목숨을 잃어요. 장례식 중 아들은 사라지죠. 뒤늦게 돌아온 아들에게 아빠가 어디 갔었냐고 묻자 아들은 엄마의 무덤에 갔다고 말해요. 지금까지 녀석의 엄마인 줄 알았던 그 유괴범이요. 녀석에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이후로 부자 사이는 소원해졌어요. 애초에 부자라고 말하기도 그런 사이였지만. 결국 아들은 고등학교 때 만나던 여자친구와 함께 집을 나가요. 어디 갔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이곳 저곳을 전전한다는 소식만 멀리서 들려올 뿐. 모든 것에 염증을 느낀 아빠는 혼자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죠."


우리는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길을 걸었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불이 환하게 켜진 오피스텔 창문을 가리켰다. 여기가 자기 집이라고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 거리고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그녀가 날 불렀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어떻게 됐어요?"


"아무도 모르죠. 잘 됐을 수도 있고 안 그랬을 수도 있고. 하지만 이건 알아요. 주인공들은 꿋꿋하게 살아갔다고. 그냥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갔다고요. 그리고 저도 물어볼 게 있어요."


"네?"


"그렇게 방에 불 환히 켜놓고 죽으면 그 전기료는 누가 낸답니까?"


그녀는 고개를 몇 번 끄덕거리더니 내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멀리서 문 여닫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밤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난 다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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