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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뜰밖 Mar 13. 2024

있어도 없는 아이

- '해방의 밤' 은유 


나만 보면, 흐뭇하게 웃으시며 “너는 참 있어도 없는 아이 같다”라고 하신, 명절 때마다 만나는 나이 지긋한 이모부가 생각나네요. 워낙 흐뭇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기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칭찬인 줄 알았어요. 시장통에서 일하시며 아들 하나를 키워내신 워낙에 손이 많이 가는 아들을 키우신 건지는 모르겠으나, 키울 때 손이 하나도 안 갈 것 같다는 또 다른 표현이겠거니 한 거죠.  


그러다 ‘있어도 없는 아이’에 대한 다른 면모를 알게 된 건 대학생 때였죠. 친한 친구에게 나는 어렸을 적부터 ‘있어도 없는 애 같다’는 칭찬을 자주 들었다고 하자, 그 친구의 표정이 달라지는 거예요. “엥? 그건 칭찬이 아닌 거 같은데?”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할 기회는 사실 없었습니다. 그러다 은유 작가의 ‘해방의 밤’ 책을 보고, 좋은 구절을 옮겨 적다가 이런 문장에 눈이 멈춘 거죠. 


“손이 하나도 안 가는 자식이었던 순둥이 딸. 자신을 비존재로 만드는 건 여자들의 개인기이자 생존술입니다. 그러나 나의 특기는 무릅쓰기, 참고 견디기. 마음 없이도 임무 수행 모드의 가동이 가능합니다.”


자신을 비존재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어요. 엄청난 일을 하고도 금세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자세를 취하는, 겸손한 수녀님들을 많이 만났죠. 물론, 자신을 비존재로 만드는 남자들을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세 아이를 재워놓고, 남편도 잠든 밤. 두 개의 시곗바늘은 앞서가다 뒤서가다 겹쳐졌다 벌어졌다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공손한 두 손을 모은 듯, 12에 나란히 서 있습니다. 퇴근하고 씻고 먹이고, 벌써 시간은 자정이 다 됐습니다. 


이제 갓 초등학교로 올려 보낸, 둘째까지. 이제 우리 집에는 초등학생 두 명이 삽니다. 그리고 20개월 전에 태어난 아기가 한 명 있죠. 다음 날 아침, 이 셋 아이들을 수월하게 먹이고 출근하려면 오늘 밤을 좀 더 쓰는 게 낫습니다. 


살림 경력 30년, 은유 작가님도 쓰는 일에만 뚝딱인 줄 알았는데, 한 끼 밥상은 몇 시간이면 뚝딱이라는 말에 주부 경력은 어디서도 쳐주지 않지만, 밥상 위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는구나 느꼈어요. 그리고 어제 한 선배와 밥을 먹으며 나눈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꽈리볶음멸치를 너무 좋아하는데, 아내는 그 맛을 못 내더라고요.”


그래서 종종 사 드신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어요. 

“아니, 선배~ 꽈리볶음멸치는 단신기사 쓰는 것보다 쉬워요.”


누군가가 “기사를 쓸래, 멸치똥을 뺄래?”라고 물으면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멸치똥이요.”

꽈리볶음멸치는, 그러니까 꽈리볶음멸치는 꽈리를 잘라서 볶다가 멸치를 넣으면, 그리고 참기름과 참깨를 넣으면 끝이 나는…. 


“주어와 조사를 찾고, 목적어를 넣고 또 조사를 찾고, 동사를 찾아 써넣는 일보다 쉽잖아요.”라고 속으로만 말했습니다. 


어찌 됐든 간에, 그렇게 세 아이와 남편이 먹을 다음 날의 일용할 양식을 준비하고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밥은 이상해서 먹는 사람은 차리는 사람의 수고를 알기 어렵지만 밥은 또 이상해서 먹는 사람을 보는 것으로 차리는 사람은 그 수고를 얼마간 보상받습니다. 해 먹이는 즐거움이 크죠. 밥을 내가 밀어내려 해도 밥이 나를 잡아당깁니다. 그래서 갑니다.” 33쪽, 해방의 밤 


밥이 나를 잡아당기는 하루를 마감하고, 새로운 밥이 나를 부르는 아침을 맞이합니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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