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 오레곤 여행
제 기억 속에 포틀랜드는 20여 년 전쯤, 아빠 출장을 종종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 시골마을이었어요. 할 것도, 살 것도 없어 아무 재미없는, 그런 미국 시골 마을 말이지요. 그렇게 그 아무 매력이 없던 동네는 제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갔습니다.
그러다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펼쳐 보는 잡지마다 포틀랜드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바로 슬로 라이프를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킨포크' 열풍이 분 것입니다. 회사 점심시간에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항상 맵고, 짜고, 단 것만 찾던 그 시절에, 느릿느릿 여유 있는, 함께 나누는 삶을 지향하면서도 한없이 시크해 보이는 그 생활이 탐이 났습니다. 바로 아래 그림처럼요! 그리고 언젠가, 그 킨포크 라이프를 찾으러 그 재미없는 마을을 꼭 다시 한번 찾으러 가야겠다,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머지않아 현실로 이루어졌어요. 미국 생활을 시작한 이후, 우리 가족은 최대한 여유 있을 때 여행을 많이 다니자고 약속했거든요. 포틀랜드가 있는 오레곤주는 시카고와 다섯 시간 정도 떨어진 꽤 거리가 먼 곳에 있었지만, 킨포크 라이프를 꼭 찾고야 말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예전보다 윤서와 함께 비행기를 타는 게 훨씬 더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이 세상의 지상 낙원, 몸과 마음이 쉬어가는 슬로 라이프의 근원지, 포틀랜드가 있을 테니까요.
이번에 예약한 호텔은 Nines라는 호텔이었습니다. 포틀랜드에서 요즘 가장 유명하다는 Ace 호텔 사이에서 잠깐 고민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희는 18개월 아기가 있으니 너무 힙스터들의 호텔보다는 편안함을 택했습니다. 호텔 위치는 포틀랜드 시내의 딱 중심에 있었습니다. 바로 앞에 큰 광장이 있었는데 사방으로 온갖 쇼핑몰과 백화점들이 있는 중심지였죠. 호텔이 크진 않았지만, 보라색을 메인 컬러로 한 인테리어 디자인에 여느 호텔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감각적이고 패셔너블한 아트 작품들로 꾸며져 호텔을 구경하는 재미를 주었습니다. 마치 패션, 장신구 박물관을 둘러보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The Nines Hotel:
호텔에 체크인한 저희는 포틀랜드 시내 구경을 나섰습니다. 20여 년 전 제가 기억하는 그 조용한 시골 마을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거리는 약간 뉴욕의 소호나 윌리엄스버그 느낌도 나고, 보스턴을 닮은 것 같기도 한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요.
마침 핼러윈 데이였던 그 날, 호텔 앞 거리에는 핼러윈 코스튬 입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녔는데, 그중에 단연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포틀랜드의 명물, 미국의 가장 큰 독립 서점인 Powell's Books의 코스튬을 입은 여성이었지요. 포틀랜드 소개 기사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그곳, 궁금했던 파웰 북스는 정말로 포틀랜드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 저희는 파웰 북스를 찾아갔습니다. 이 책장, 저 책장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지요. 선반마다 직원들의 손글씨로 어떤 책을 왜 추천하는지 친절하게 써붙여놓았는데, 그걸 읽는 것도 정말 재밌는 일이었거든요. 정말 애정이 듬뿍 담긴 사랑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전 이 아름다운 책방을 기억하고 싶어 기념품으로, 포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책 Wild를 한 권 집었습니다.
Powell's Books:
저희는 포틀랜드의 가로수길이라는 별명을 가진 23번가를 찾아갔습니다. 이곳에서라면 분명 제가 찾고 있는 킨포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잡지에서 본 것처럼 거리에 천편일률적인 미국 간판 브랜드 대신 로컬 디자이너들의 샵들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전 손으로 직접 깎은 나무로 만드는 공방이나 이 지역 출신의 화가의 아뜰리에, 혹은 아메리칸 퀼트로 만든 작품들을 파는 상점을 상상했거든요. 심지어 소비세도 0%인 보기 드문 도시라, 뭔가 마음에 들어오는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사야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아름다운 낙엽진 그곳은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그 거리에는 분명 제가 찾는 Kinfolk는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 곳에 와서, 여기가 포틀랜드구나, 느꼈던 곳은 바로 의외의 장소에서였습니다. 바로 Salt & Straw라는 한 동네 아이스크림 집에서였죠. 도대체 무슨 아이스크림을 파는지 모르지만 줄이 길어도 너무 길었습니다. 줄 서는 걸 정말 싫어해 동네 한 바퀴 돌고 오겠다고 한 저 대신 줄을 서있던 남편은 거의 한 시간 반 만에 아이스크림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 앞에 서니 왜 이렇게 줄이 안 줄어드는지 깨달았습니다. 바로 한 사람당 원하는 만큼의 아이스크림을 종류별로 맛볼 수 있게 한 것이지요. 손님이 원하는 취향을 말하면 점원은 몇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떠 오고, 만약 다 맛없다고 하면 또다시 새로운 몇 가지 맛을 소개해주고 있었습니다. 또 각각의 아이스크림 재료가 어디에서 왔고, 얼마나 신선 한 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말이죠.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려고 그 긴 줄을 서는 손님이나, 손님이 원하는 맛을 찾아주겠다고 마치 비싼 와인 파는 소믈리에 같은 점원이나, 제 눈엔 이게 바로 포틀랜드였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고른 보랏빛 라벤더 아이스크림은 맛도, 향도 끝내주게 좋았습니다.)
가을이 온 포틀랜드의 나무들은 제 순서대로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 곳의 가을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일본 전통 정원을 본 따 만든 '재패니스 가든'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소문대로 단풍 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정원 곳곳에는 일본의 전통 공예를 활용한 모던 아트 작품들이 전시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재패니스 가든의 포토 스폿에서 우연히 저희의 다음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포틀랜드를 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 마운트 후드(Mt. Hood)였습니다. (사진을 확대해보면) 저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이 바로 그곳이지요. 앞서 얘기한 제 포틀랜드 기념품(=책) Wild에도 자주 등장했던 산이에요. 지대가 낮은 도심 안에서는 잘 안보이던 저 산이 꽤 높은 산속에 있는 재패니스 가든에서는 정말 잘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산을 조금 더 가까이에 가서 보기로 했습니다.
마운트 후드를 향해 차를 타고 한참을 달리자 우리는 그제야 우리가 오레곤 주의 품 속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간중간 차에서 내려 구경을 하기도 하고, 또 그림 같은 멀트노마 폭포를 위에서 보고 싶어 두 시간 산행을 하기도 했지요. 윤서는 떨어진 단풍잎을 주워가며 신나게 산을 따라 올랐습니다. 사실 마운트 후드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 저녁이 다 된 시간이고, 또 산에는 저희 뿐 지나가는 차도 없었습니다. 때맞춰 비바람이 불기 시작해 저흰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서둘러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마운트 후드를 찾아오는 길 따라 오레곤주의 가을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지요.
자, 그래서 저는 이 여행을 통해 제가 목표하던 Kinfolk를 찾을 수 있었을까요? 시크하면서도 트렌디한 그 슬로 라이프 말입니다. 글쎄요, 어쩌면 그건 노련한 잡지 전문가들이 잘 만들어낸 콘셉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틀랜드는 분명 요즘 여행자들의 희망 리스트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곳은 맞습니다만, 잡지나 인스타에서 본 그걸 반드시 찾겠다는 마음으로 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는 곳입니다.
대신 제가 발견한 포틀랜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포틀랜드 사람들이 사랑하는 포틀랜드. 동네 주민들이 동네 책방을 좋아해 즐겨 찾고(핼러윈 코스튬을 만들어 입을 정도로), 맛있는 로컬 아이스크림 가게를 두 시간 줄 서서 먹으며 행복해하는 그런 동네 말입니다. 사실 아주 특별한 건 없지만, 이쁘다, 이쁘다 사랑을 듬뿍 받아 더 이뻐진 동네, 그게 바로 이유 없이 기분 좋아지고 가보고 싶은 옆 동네, 포틀랜드의 진짜 모습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