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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호 Aug 12. 2021

투명한 사회와 불투명한 개인

한병철의 <투명사회>를 읽고

인스타그램을 켜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전능한 AI의 알고리즘이 내가 봐야할 이미지들을 나열해준다. 요즘 요리해보고싶은 포크벨리, 귀여운 고양이, 운동과 관련된 이미지들이 대부분이다. 휴가철이라 검색해보았던 프라이빗한 숙소들의 정보도 덤으로 올라온다. 정신없이 넋놓고 보다보면, 이미지의 강요를 받고있다는 생각이든다. 내가 탐색하고 선택하는 일상이 아니라 이미지의 일상을 강요받고 있고, 또 그것이 행복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버린다.


한병철은 SNS 기반한 오늘의 사회를 ‘투명사회 정의한다. 서로가 서로의 삶을 투명하게 관찰할  있는 사회, 자신의 삶을 누구든지   있도록 어필하는 사회이다. 그것이 단순한 이미지이든, 도덕적인 바른 삶이든, 성공한 인생이든 말이다. 하지만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투명이라는 단어가 가진 폭력성을 소개한다. 저자는 투명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전시적 연출만이 가치를 생성한다. 사물의 고유한 형태는 폐기된다.”(34)


SNS에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오직 전시라는 목적을 가지며, 이 전시는 사람들을 매혹해야하는 상업성을 띄게된다. 그것이 꼭 이윤창출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전시를 위해서 부정적인 요소들은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 눈가의 주름, 이마에 난 뾰루지는 가볍게 포토샵으로 가려주어야 하고, 짧은 다리를 위해서는 좋은 구도설정으로 환시현상을 만들어내야한다. 저자의 말대로 “전시가치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외양에 달려있다. 그래서 전시의 강제는 성형수술과 피트니스클럽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34)


부정적 요소의 제거는 나인듯 내가 아닌 요상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낸다. 이미지는 단순히 이미지를 만들어내라는 것을 넘어 이미지가 되라는 강압을 한다.(35) 더 이상 행복한 이미지로 만들어지지 못한 나는 상품의 가치가 떨어진다. 다른 이미지에 비해 도태된다. 순식간에 판단하고 지나가는 대중의 ‘좋아요’에 외면당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의 향연인 SNS에는 도태되지 않기 위한 이미지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미지들은 모두 비슷한 색감과 구도와 체험으로 획일화되어 있다. 우리는 이미지로 나름의 자기위로와 안정감을 찾는다. 타인과 다르지 않게 나도 행복하다는 안도감 말이다.


이런 와중에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현실의 삶이 이미지에 의해 강요된 삶이라는 사실이다. 삶의 축이 변했다. 전시되어 있는 타인에 대한 동경과 전시되고 있는 나에 대한 강박이 급속하게 업데이트되는 이미지에 의해 생겨난다. 자신의  부정성에 대해서 깊이 숙고해보며 새로운 ‘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사유의 기본인데, 너무 급하게 부정성들을 제거해버리니 ‘의미의 공허’를 마주한다. 자기의미에 대한 공허감, 자기다움에 대해 더욱 흐릿해져가는 과정을 겪는다. 자신을 전시한 이미지에 역사적 서사나 사연따위는 필요없다. 더 노출되도록 상품화만 잘 시키면된다. 타인의 지극히 단순한 ‘좋아요’가 공허한 성공감을 선사해주니 말이다.


투명사회에서 타인의 이미지는 타자와의 만남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앞으로 체험할 무언가로 연결된다. 그렇기에 투명사회에서 나르시시즘은 더욱 과열된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체험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볼 뿐이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한다. 그에게 현존재의 경계는 흐릿하다. 그런 까닭에 안정적인 자아의 이미지도 생겨나지 못한다.“(77) 우리는 투명한 사회를 살아가지만 불투명한 자아를 마주한다.


우리는 점점 타인을 의식한다. 타인의 이미지에 장악당한다. 그리고 자아와 사유를 잃어간다. 사르트르가 말한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명제는 SNS에 교묘하게 스며들어 있다. 타인의 시선은 자아를 혼잡하게 만든다. 타인의 시선은 ‘전시된 행복’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도록 인생을 단순화시킨다. 현대인은 스스로를 관찰과 전시의 유리창에 노출하고, 스스로를 통제와 감시의 파놉티콘에 가두어놓는다. 현대인은 어느 시대보다 활동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사실상 서로에게 감옥이 되었다. 단순하고 획일화된 이미지 세상안에서 자기다움의 가치는 불투명해져가고 진정한 공동체와 소통은 상실되어 간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말로 글을 맺는다.


“투명사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단지 공동의 관심을 좇거나 하나의 상표를 중심으로 모인 여러 에고의 집합처럼, 고립된 개인들의 우연한 무리가 생겨날 뿐이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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