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가 훑고 간 잿빛 세상에 금빛 가루를 뿌려줘요 - 국립무용단 <미인>
1년의 권태를 씻었다. 복제와 스타일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색을 볼 수 있을까. 흑백 세상에 금빛처럼 빛나는 미인을 만나고 왔다.
이토록 권태로운 적이 없었다. 유명인의 전시회는 가짜 슬라이드가 난무했다. 유명하다고 해서 온 나와 같은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이곳저곳을 찍기 바빴다. 셀럽이 다녀갔단 전시가 늘 그랬듯. 빈 슬라이드가 있는 영사기에 한참 스마트폰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들. 몇 시간이 걸려 도착한 곳엔 이렇다 할 감탄보단 권태로움과 후회만 남았다.
스마트폰, 태블릿처럼 모바일디바이스에 맞춰진 세상은 탁하기만 했다. 요즘 GPT가 만든 지브리 풍 프로필이 귀엽더라. 하면서 난무하는 AI가 만들어낸 탁한 채도의 사진들이 피드에 도배됐다.
슬롯머신처럼 새로고침을 해도 새로움은 없었다. 스마트폰 세상에는 유명한 사람이 더 유명해진 이야기, 유명한 사람들이 모여 술을 나눠마시며 주량이나 별로 궁금하지 않은 남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스마트폰 세상 밖에는 그 프레임에 절대 낄 수 없는 내가 존재했다. "댓글로 남겨주세요."라는 문장 속에만 존재하는 트래픽으로서 존재하는 나는 더 이상 그 안에서 살고 싶지 않아 졌다. 생생하게 살고 싶어졌다. 영혼이 죽은 채 그냥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내기 바빴던 내가 할 수 있던 건 권태 속에서 한껏 질척이며 인스타를 스크롤하다 눈에 들어오는 게 있으면 그거 하나 보려고 몸을 질질 끌고 나가는 것이었다. 이 사진 하나가 날 권태에서 끌어올렸다.
올 한 해 이렇게 멋진 사진을 처음 봤다. 그래서 꼭 가야 했다. 대체 어떤 춤을 봤길래 이런 사진이 태어났을까? 어떤 모습을. 광경을 봤길래 포토그래퍼는 이런 장면을 사진에 담았단 말인가. 나는 꼭 봐야 했다. 그 장면을, 감성을, 색을 직접 목도하고 싶었다.
운이 좋게도 오픈리허설, 본공 모두 구했다. 전진도 했다. 2층 1열 중앙으로. 계속된 실망에 지친 것일까 4월 2일.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생각한다. "이번에도 실망하면 어떡하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속담을 되새기듯 기대와 실망을 오간 긴 시간을 돌아 국립극장에 도착했다.
공연은 참 많은 걸 탄다. 날씨, 그날 옆 관객, 내 컨디션, 출연진들의 컨디션 등 갖가지 조건이 그날 공연과 기억을 만든다. 2025년 4월 2일 수요일은 오늘처럼 날이 흐렸고, 나는 들떠있기보다 가라앉아있었다. 로비엔 둥근 머리를 정갈하게 높게 틀어 올린 무용수를 꿈꾸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공연 시작까진 20분 정도 남아있었으나, 로비를 둘러보며 사람들을 살펴보곤 객석에 들어섰다.
객석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대화, 상기된 기대감과 전화 소리, 허겁지겁 뛰어오는 사람들. 표정과 대화 속에서 공연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블랙아웃. 공연이 시작됐다.
샤가 걷히자, 직사각의 뿌옇고도 뚫어지게 보면 선명해 보일 것만 같은 상자 형상 속에 가채를 높게 튼 <미인도>과 같은 실루엣의 여인이 등장한다. OP석에서 산수경석처럼 등장하는 형상의 무용수들. 실루엣을 보자마자 난 이 공연이 레전드가 되리라는 것을 느꼈다. 공연이 시작된 지 5분도 안된 사이에 나는 <미인>에 취했다. 60분 간의 공연 내내, 마치 2박 3일의 축제를 보낸 듯 두 번의 밤이 지나 새벽이 되어 깨어난 사람처럼 충만해졌다. 복제와 탁한 색채감이 가득한 세상에서 60초의 집중력을 빼앗긴 채 60분의 아름다움을 보고 왔다.
무용, 사람의 살결, 몸짓이라는 에너지에서 텍스트로 말하기 부족한 하나가 있다면 '텍스쳐' 즉, 질감이다. 팔을 휘두른다고 해서 셔속 1초로 지나간 잔상이 면처럼 보이진 않는 라이브 무대에서 면으로 넓이와 질감을 보일 수 있는 건 의상이다. <미인>은 매끈하고 엉킨 얼기설기한 땋은 머리를 손에 쥐게 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매만질 수 있는 머리카락은 흰색과 검정으로만 눌러준 무채색 공간에서 느껴지는 질감이었다. 흑과 백의 대비 그리고 들어 올려진 치마의 면적, 가슴선에서 떨어지는 의도된 폭만큼의 면에서 무용수들의 팔뿐만이 아닌 길게 늘어뜨려진 댕기 머리의 선이 무대를 더 섬세하게 밀도를 높이고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은 산수경석 같아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앞에서 본 높은 가채의 여인이 가지고 있거나 그 사람과 함께한 사람들이 자주 바라봤을 아주 수려한 귀한 신분의 집 안에 있는 수석이나 난처럼 아주 오랫동안 귀하게 다뤄졌을 모습이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큰 보름달이 무대에 위치한다. 암부를 누르기 위해 뭉쳐진 까마귀같이 복장을 한 무용수들 사이에서 드러난 핑크 부츠. 그리고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쥐어지는 왕관 같은 액세서리와 그것을 향해오는 여인. 먹처럼 뭉쳐지고 흩어지고 하지만 단순히 먹물 같은 흐름만 보여줄 뿐 아니라, 먹 자체를 쥐여준다. 댕기 머리는 대형이나 무용수의 팔에서 느껴질 수 없던 질감의 선을 무대에 위치시킨다. 마치 먹의 아주 날카로운 단면을 갈고 있는 듯 짙은 농도로 다가온다.
<미인>은 마치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생애와 죽음을 타임라인처럼 쭈욱 이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승무가 가진 '염원하다'라는 의미가 가장 크기 때문일 테다. 아마 품에 앉은 '미인'이란 두 글자가 가져다주는 의미에 대한 개인적 해석과 2장의 승무가 가진 의미가 합쳐져 무대를 해석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테다.
'미인은 무엇을 바라는가. 무엇을 위해 신께 바라는가. 무엇을 위해 몸짓하는가. 무엇을 위하는가.'
단순히 '미인'이 아름다운 사람이나 형상에만 그치는 의미가 아닐 거란 의심은 승무에는 특별히 뻗어나가는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형상의 모습을 했다. 흰 고깔, 흰 저고리, 흰 장삼 그리고 양손에 든 부채. 긴 천을 펄럭이는 보다 단순한 동작들에선 전통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움직임과 인간으로서 번민을 벗어나고자 하는 덜어냄까지 느껴졌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아야만 하는 이미지는 욕망과 바람이 담긴 승무는 <미인>에 들어서 다채로운 색채감과 형태를 더해 더 나아진 세상을 향한 희망의 의미를 신비롭게 만든다.
요즘엔 듣기 힘든 어린 시절의 실로폰 소리(글로켄슈필) 같은 사운드는 마치 어린 시절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비눗방울을 불며 쏘옥쏙쏙 방울 빙글빙글하며 불렀던 노래 속 웃음과 희망이 가득했던 장면처럼 느껴진다. 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향수가 느껴지는 듯한 사운드는 승무 장면뿐만 아니라, 후반부 칼춤 장면에서 신시사이저와 같은 소리로 이어지며 레트로한 사운드로 한층 더 작품을 다채롭게 한다. <미인>은 패션으로도 다채로울 뿐만 아니라 사운드까지도 결합하며 공연의 완성도를 더해주고 있었다.
국립무용단의 <미인>은 프로모션에서 보인 채도 높은 색채감을 먼저 보이는 게 아닌 무채색 - CMYK 같은 채도 높은 색상으로 의상을 배치함으로써 포인트와 관객의 시선과 감상을 의도한다. 점점 끌어올려지는 생경하고 생생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보름달이 한 톤 죽으면 정중앙 사이로 산의 형상을 한 직삼각형의 초록색 형상이 나타난다. 몇 겹이나 겹쳐진 질감의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둥그렇게 모여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미인>은 해박한 내러티브에 대한 해석 없이도 직관적으로 관객들이 딱! 알아차릴 수 있는 노랫소리, 무대 장치 등으로 포인트를 확연히 드러내 보인다.
유네스코에 기재된 강강술래의 내용에 따르면, 옛날 한가위를 제외하곤 농촌의 젊은 여성들은 큰 소리로 노래하거나 밤에 외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강강술래를 통해 잠깐이나마 해방감을 느끼며 즐겼다고 한다.
아마 약간 톤을 죽이듯 낮게 그렇지만 질끈 거닐며 힘을 얹어 '하-안(한)' '강강술래'라고 부르는 노랫소리는 일상 속 그림자로 치부되던 배경적 역할에서 벗어나 형형색색의 사람이었어야만 하는 여인들을 가리킨 것이 아니었을까.
강강술래를 도는 여인들의 의상도 하나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마치 전통적 역할에서만 취해졌던 여성이 선택할 수 있었던 향토적 색채감의 삼베와 모시와 같은 얇고 여린 원단들로 이뤄져 있다. 그 와중에 꾸며보고 싶던 마음이 드러나듯 옷에 컬러가 없는 이들에겐 댕기에 색감을 넣어줌으로써 해방감을 더해주었다. 풍부한 질감의 연출은 창작자의 시선을 과연 감탄하게 만드는 장면들이었다. 신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비치고 다뤄졌던 여인들에 대한 합은 단순히 뭉쳐진 뭉텅이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사람이라는 듯 결을 살려 표현한 듯했다.
<미인>의 작품 속 연출들을 보고 있자면, 창작하는 이들의 기쁨이 보인다. 오랜 훈련으로 다져진 프로포션과 일반적인 움직임을 뛰어넘는 유려함을 보일 수 있는 기능적인 면모와 같은 조건들이 창작 아티스트들에게 주어졌을 때 어디까지 상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한계를 이미 찍고 그 이상을 넘어서고자 했던 감각들과 철학이 보인다. 마치 무용수들이 무대의 끝과 발의 끝을 쓰며 "끝까지 써!!! 끝까지!!!"라고 말하는 느낌이 작품 모든 곳에 깃들어 있다. 인위적일 수 있는 합마저 자연스러움으로 느껴질 정도로 노력했을 모습이 그려진다. 몸의 끝, 무대의 끝, 그리고 감정의 끝까지 밀고 나가는 무용이라는 예술의 정신마저 느껴진다.
강강술래가 끝나고 난 뒤 자칫 분위기를 약간 튈 수도 있는 패션쇼와 같은 장면은 마치 크로스페이드 되어 이전 장면과 아우러진다. 의미 면에서 레이어링 된 장면이기 때문인데, 그게 강강술래를 하며 눌러왔던 해방감을 표출하는 장면이진 않았을까 싶어서다. '자! 하나하나 봐 봐.'라고 무용적인 움직임 없이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오는 건, 단순히 의상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둠에서 끌어올린 여인들의 모습들 의상에서 존재감을 보이기 위해 하나씩, 한 명씩 보여주려는 강강술래의 내용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뻐꾸기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 무대 위 밤도 저문다. 고요해지듯 사라지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로 소란스러운 움직임이 들린다. 침묵만이 남은 짙은 밤을 깨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깨달았다. 극장이 아니었더라면, 이 북소리가 이렇게까지 심장을 때릴 수 있을까? 공연장 안의 깊이만큼 숨조차 다르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집중하느라 고요해진 공연장의 정적을 한껏 찢고 올라온 북소리는 소리로, 대형으로, 한 군중의 소리가 되어 객석으로 밀고 들이닥치는 기세였다.
마치 의자를 누가 뒤에서 때리듯 두꺼운 타악 소리가 공연장을 울린다. '분명 녹음된 소리는 아닌데'라고 생각한 순간 중앙열 양쪽으로 무용수들이 북을 두드리며 짙은 타악 사운드를 끌고 온다. 심장이 반응할 수밖에 없는 템포와 저음부의 타악 베이스까지 합쳐져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앞선 장면들이 색채와 형태로 대비감을 보여주었다면, 이 장면부터는 사운드로 집중도를 확 끌어올린다. 세상에 낮과 밤이 있듯 의상은 흑과 백으로만 이뤄져 있다.
무용수들은 검고 어두운 밤에라야만 나타나는 욕망처럼 나타나 중앙에만 하얀색이 섞인 의상을 입은 한 명의 무용수만 위치시키고, 나머지는 실루엣으로 바깥을 눌러주어 더더욱 형태미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초승달같이 날카롭고 뾰족한 곡선의 헤어 액세서리, 낮과 밤 사이에만 존재하는 듯한 흑백의 의상, 명도로 대비되는 강렬함은 흩날리는 샤같은 실루엣을 구름처럼 흐트러뜨린다.
아래로 사라지기 전까지 템포와 함께 움직임은 단 한 번도 꺼지지 않는다. 특히 <미인>의 북춤은 기존 작품 속 힘의 역할을 뒤바꾼다. 기존의 무용 작품들에서 강렬함과 힘은 남성 무용수들에게 다소 주어진 면이 있었다면 <미인>은 전복한다. 여성 무용수들이 충분히 보여 줄 수 있는 강렬한 에너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거기에 더해 여성 무용수들이 가진 선예도와 실루엣이 가진 섬세함을 한층 끌어낸다. <미인>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몸과 움직임 그 자체로 해방을 증명하는 데서 온다. <미인>은 무용수들의 성별이 가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힘의 해방감을 정의한다. 특히 이 장면에서 말이다.
2025년에 전통은 너무 뻔할지도 모른다. 그저 계승 정신만 남았다고 하기엔 가치는 너무 소중하고, 현대의 젊은 사람들은 가치를 알지만 이따금 따분하기도 하다. 특히 전통에 있어서 무용과 국악에 있어서 더 그러하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이 따분하고 고루할 수 있는 레퍼토리를 어떻게 타파할 수 있을까? <미인>은 패션으로 고리타분함을 타파했다.
한국 사람이라면 배웠고, 이미 누차 알고 있는 부채춤에 아이래쉬 같은 형상을 담았다. 부채는 악기가 되듯 새의 날갯짓 같은 소리를 더한다. '미인'이란 두 글자를 마음에 품고서 본 무대 위의 장면 속 부채는 마치 아름다움에 반하는 순간, 느려지는 잔상 같은 눈꺼풀인 것만 같았다. 너무 뜨거울 대로 뜨거워져 아지랑이 일렁이듯 한 기타 사운드는 컨츄리 장르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신기하게도 <미인>의 사운드 구조는 작곡가가 에고적 사운드만 고집하는 게 아닌, 마치 1차 관객인 것처럼 '이쯤에서' 보여주는 포인트를 곳곳에 배치해 두었다. <미인>은 작곡가와 무용, 연출, 조명, 패션 모두가 어우러지는 장면의 연속이다. 보여줄 만큼 한껏 보여주고 지칠 때쯤에 강렬한 직선 조명의 대비와 일렬 대형에서 펼쳐지는 안무, 그리고 힘 있게 이어진 춤은 익히 하는 부채춤 대형으로 맞춰지며 살랑살랑 흔들리는 부채들로 잔상을 주어 부드럽게 페이드아웃 된다.
매끄럽게 블렌딩 된 크리에이티브, 사운드는 소멸돼도 춤은 잔상처럼 남는 포인트에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현장감'이란 단어 안에만 묶어 놓고 싶지 않은 칼춤이었다. 침묵을 감탄으로 끌어올린 객석으로 난입한 북을 활용한 타악 사운드, 새가 날아드는 부채의 종잇짓 소리, 칼돌리기로 부딪히며 만들어지는 쇠 맛의 질감은 현장감 이상의 음악적 사운드 요소로 다가왔다. 특히 칼춤의 음악에선 신시사이저의 소리가 곁들여지면서 최근 K-POP의 주 소재였던 금속성인 질감과 록 밴드의 감성까지 느껴졌다. 북춤과 더불어 사운드적 쾌감이 극에 달한 장면이었다.
<미인>의 칼춤은 전통적인 계승과 더불어 현대적 승화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오프닝부터 멋들어지게 전립의 각을 잡는 몸짓은 앞으로 <미인>의 칼춤은 무엇이 다른지 형체로 줄거리를 보여주는 듯했다. 절도 있는 모습에서 오는 힘과 침묵은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전장과 같은 무대 위 2인의 대결 구도는 색채적 대비가 일품이었다. 모든 몸짓과 오브제가 보여줄 건 보여주고, 덜어낼 건 확실히 덜어낸 세련됨이었다.
<미인>의 칼춤은 하나가 놓이면, 다른 하나가 놓이는 쌍의 형상은 마치 이전에 부채춤에서 본 잔상(Shadow)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커다란 무대는 마치 체스판이 되어 쌍을 이룬 무용수들은 체스 말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후에 프로그램 북을 보니 의상·오브제 디자인을 맡은 서영희 디자이너님께선 강렬하고 힘 있는 여성성을 보여주기 위해 승마복의 일종으로 옛 여인들이 말을 탈 때 입었던 말군바지를 풍성하게 디자인하셨다고 한다. 전립은 펜싱 마스크에서 영감을 받아 앞을 살짝 꺾은 형태로 디자인하셨다고 한다. 이렇듯 <미인>의 모든 오브제는 설명 없이, 그저 눈앞에 있는 관객에게 감각으로 밀려온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미인>을 보고 검무에 반해 의미를 알기 전까지 나는 검은 남성 무인들의 것인 줄로만 알았다. 검무의 시작은 삼국시대 신라 화랑인 황창량의 '황창검무'라고 한다. 어찌나 검무를 잘 추었는지 신라시대 소년 황창량이 검무를 잘 추어 백제왕이 그를 불렀는데, 백제왕 앞에서 검무를 추다가 그만 던져진 칼에 백제왕이 맞고 죽었다고 한다. 아마 나도 현장에 있었다면 맞은 게 칼인지, 검무의 강렬함인지 모르고 죽었을 것 같다.
검무의 시작은 소년이었지만, 전국의 감영 소속 교방의 기녀들이 추었다고 한다. 국립국악원의 국악사전에 '검무'에 대한 서술에 의하면, 검무는 호국 정신과 상무(尙武, 무예를 중히 여기고 숭상함) 정신을 배경으로 추는 예술성 짙은 춤이라 한다. 정의조차도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기녀들이 양손에 칼을 들고 추는 춤이라 되어있다. 늘 전통적인 국악 사운드에서 느껴진 아쉬움과 이전에 볼 수 없던 장면을 보고 싶다던 갈증이 모두 해소된 장면이었다.
나는 왜 <미인>에 감탄했을까. 감탄이 지나간 자리에 질문이 남았다. 이 감동, 선명하게 보일수록 더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왜 더 컬러풀한 시선을 탐내는가. <미인>의 무엇이 나를 흔들었을까. 익히 알던 부채춤인데도 <미인>은 눈꺼풀처럼, 잔상처럼, 감각의 끝에 다다르게 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요즘 K-POP 콘텐츠 씬에서 흔한 단어가 되어버린 '미감'이란 단어가. 하지만 이토록 감탄을 남기는 순간은 왜 드문 걸까.
국립무용단의 <미인>은 미감이란 단어로 엮은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극찬인 미감이란 말은 이젠 지나칠 정도로 이곳저곳에서 쓰이는 것만 같다. 최근에 SNS상에 올라온 신인 아티스트들의 앨범, 콘셉트 포토를 보며 <미인>의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그간 많이 소비한 K-POP 콘텐츠들에 대해 생각했다. 왜 그 미감들은 잠깐이고, <미인>은 잔상이 남았을까? 오리지널리티가 무엇인지 희미해지는 것만 같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유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아티스트의 손길에 닿은 연출은 '감다살'(감 다 살아남)이 되거나 '미감'이란 말로 바이럴 되며 아티스트의 전초전 홍보 타이틀이 된다. 어린 나이대의 아티스트들은 그게 얼마나 찰떡처럼 받아먹는지로 이어져 이미지가 된다. 하지만 최근에 미감이 뛰어나다는 프로모션들은 많았으나 작품에 있어서 그만큼의 감탄으로 이어진 콘텐츠는 드물었던 것 같다.
음악으로 완성되어야 할 부분에선 아쉬움이 컸고, 그 빈자리를 시각적 프로모션으로 뒤덮은 느낌이 컸기 때문이다. 자주 소비했던 K-POP 콘텐츠의 아쉬움의 한 편엔 늘 '진정성'이란 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저 연출된 것들에 잘 따라가기만 하면 작품 혹은 아티스트는 완성되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품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복제와 스타일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에 감탄하고 있는가. 무엇이 진정성을 만드는가.
아마 나는, 여전히 오프라인의 힘을 믿으며 조금은 세련되진 않은 투박한 열정과 집념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들을 끝까지 쓰고자 하는 정신을 찾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전통 무용에 대해선 알지 못하는 나는 '미인'이란 단어만 눈에 굴리며 무대를 바라보니 '여자' '하얀' '하늘로 가는 천' 따위의 모습이 웨딩드레스처럼 보였다. 후에 이게 '베가르기'란 무속 의례였다는 것을 알고 몹시 부끄러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무대를 보면서 무용수의 몸짓이 마치 행복과 슬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형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약간은 어릿광대 같기도 한 어린아이 같은 포즈를 취하는 모습에 나는 결혼이란 단어까지 생각한 것이다. 그저 '미인'이란 두 글자에만 근거를 두고 '결혼은 필시 저럴 수도 있다'고만 생각했다. 인생에 있어서 이전의 나는 죽고 다시 살아 나가는 전환이거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 혹은 뒤에 이은 탈춤에 이어 그게 아직 땅에 안착하지 않은 자녀의 모습은 아니지 않을까? 넘겨짚으며 말이다.
프로그램 북에 따르면 이 장면은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세계'라 설명하고 있었다. 베가르기를 알게 된 건 한참 뒤였지만, 그때 그 순간 내 안에 피어난 감각은 너무나 선명했다. 권태란 가뭄이 적셔지고 싹이 움트는 감각이었다. 관객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착각이었고, 감각은 작품에 강렬히 몰입하고자 한 또 다른 진심으로 다가왔다. 흥미로울 것 없던 일개 관객의 감상뿐이라 생각했던 내 세상에서 <미인>은 큰 일을 내고 간 것이다. 내가 느낀 감정과 실제 의도의 간극은 '틀렸다'는 불쾌감이 아닌, '다름'이 되어 재미가 되어주었다.
이어진 탈춤 장면에서는 북춤처럼 객석 이곳저곳에서 실제 목소리 같은 것들이 들려왔다. 새벽을 깨우는 소리에서 펄럭이는 탈들의 종잇장 소리가 수군대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확고해져 가만 갔다.
'결혼 맞지? 첫날밤에 어떤지 수군거리고 헛기침하는 영감들과 이웃 사람들의 모습 아냐?'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금가루가 휘날리는 피날레 장면에선 해외로 뻗어나가는 H.O.T. 의 장우혁이 생각나는 90년대 향수와 K-POP을 닮은 세일즈 모멘트까지 느끼며 '미인'의 인생을 산 여성의 인생사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미인'이란 두 글자로만 무대를 계속 응시했을 때 느껴지는 메타포 같은 순간들 - 무언가에 반할 때 보이는 눈꺼풀의 아이래쉬의 잔상, 웨딩드레스, 버진로드, 다시 진열장에 아름답게 가둬지는 실루엣을 감탄하게 하는 프레임 모두가 '미인'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성이라면 느껴봤고, 아름다움에 감탄해 본 사람이라면 느껴본 극치의 꼭짓점에 있는 것만 같아 황홀했다. 행복했다. 해석이 틀렸어도. 뿌옇기만 하던 한 세상이 선명해질 정도로 손끝에 감각이 아렸다. 선명한 세상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지난 시간이 후회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미인> 이후에 보일 세상은 얼마나 색채감이 도드라질지 설레었다.
대다수의 콘텐츠가 오프라인보다 SNS에서 먼저 접하는 시대에, <미인의>의 프로모션은 왜 보그코리아여야 했는지 납득되는 콘텐츠였다. 그깟 거 그냥 유튜브로 보면 그만이지라는 세상에서 기꺼이 공연장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모바일 세상에선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무대의 높이와 깊이, 넓이, 제아무리 값비싼 스피커와 선명한 디스플레이 패널도 공연의 선명함을 담아낼 순 없기 때문이다. 종이 잡지란 손에 한 장 한 장 잡히는 아날로그적 감성과 명성에 내포된 비교될 수 없는 역사, 패션이란 장르의 꼭대기에 있는 <보그>처럼 국립무용단의 <미인>은 과연 괄목할 만한 과거는 어떻게 현재로 올 수 있는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었다.
<미인>은 극장이란 물리적 특성과 한계, 공연이란 집체적 예술을 가장 첨예하게 보여준 작품이었다. 태블릿이 아닌, 홈 프로젝터나 영화관이 아닌 공기의 깊이와 심장을 때려 박는 사운드 모두가 느껴지는 공연예술 그 자체, 국립무용단의 <미인>엔 시각적, 청각적 쾌감이 가득했다.
2층에서만 보이는 풍경 또한 좋았다. 보름달 같은 에어 벌룬도 좋았지만, 초승달이나 그믐달처럼 보이는 모양새는 뮤지컬 <시라노>가 생각나기도 했다. 바깥세상에선 별 볼 일 없는 36.5도의 사람이었지만 객석에서 공연을 보는 순간만큼은 나도 시라노처럼 공연 풍경을 시처럼 운율을 읽고 헤아릴 수 있었다. 이래서 공연장에 가나보다. 바깥세상에선 현실과 동떨어진 말만 하는 이상한 사람일지 모르지만, 공연장에서는 허락하니까. 외롭지 않은 순간이었다. 행복했다.
탁한 색채들로 가득하고 시시각각 빠르게 변화해야 한다고만 말하듯 주는 가식적인 도파민의 세계에서 진짜를 봤을 때의 황홀경은 남다르다. <미인>은 그렇다. 압도적으로 생생하고 다채로워서 마치 해석하지 않아도 단순히 '미인' 두 글자를 들고서만 봐도 아름다운 형상에 반했을 때 느껴지는 잔상과 감탄을 다시 일깨워준다. 지난 1년 간의 권태로움이 마치 씻김굿이라도 한 듯 싹 씻긴 기분이다.
<미인>은 처음엔 아카시아 향이었다가 이내 소다처럼 'POP!'하고 터지는 풍선껌처럼 같았다. 무용수들의 몸짓을 따라 '미인'이란 두 글자를 입안에서 굴리다 보면 입 안 가득 반짝이며 퍼져가는 자극이 기분 좋았다.
만일 예술이 고루해졌다면, 세상이 점점 흑백으로 변해가고 있다면 <미인>은 필시 감탄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벌써 <미인>이 그립다. 세상은 매번 내게 더 많은 실망을 선물할 테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필시 <미인>을 떠올릴 것이다. 좌절들과 실패는 다시 내게 말하겠지.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고. 그럼 나는, 스마트폰 대신 옷매무새를 고쳐 입고 또다시, 공연장으로 <미인>을 만나러 갈 것이다.
출연진
김현숙 김현주 장현수 김미애 김은영 김영미 문지애 정세영 최원자 정소연 이윤정 정현숙 김은이 엄은진 김회정 박미영 장윤나 전정아 이민영 이희영 박지은 송지영 박혜지 이요음 박소영 박수윤 이재인 김나형 이승연
창작진
예술감독 김종덕
연출 양정웅
안무 정보경
의상·오브제디자인 서영희
음악 장영규
무대디자인 신호승(Roh Haus)
조안무 송지영·송윤주
조연출 윤영주
음악조감독 최영
무대디자인 코디네이터 신나경
조명디자인 원재성
음향디자인 이상현
영상디자인 김장연
무대감독 양정원
의상·오브제제작감독 김지원(모리노리)
헤어피스제작감독 박규은(큐밀리너리)
의상감독 조근하
소품감독 채수형
장신구감독 김은경
분장디자인 박효정
분장팀 박효정 오하나 한도희 박영빈
쌍검 검술지도 김은희
콘셉트 사진 보그 코리아
사진작가 최나랑
홍보물디자인 워크룸
홍보영상 스튜디오 것
옥외홍보물 대일특수
재활트레이닝 롤링 엔 웨이브
명주 후원 함창명주·아워시선
*출연지와 창작진은 국립무용단 <미인> 프로그램 북 발췌, 오타 있을 시 말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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