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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winkup Sep 02. 2016

다육이 꽃이 피었습니다

꽃피는 계절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 

문득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걸 느끼고, 올려다본 하늘이 저 멀리 높아져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가슴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그토록 끈질기게 들러붙던 무더위가 사라지고, 시원해진 바람은 긴 여름에 지쳐 늘어진 다육이들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가슴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에너지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미동 없이 지내던 - 콩을 닮은 다육이 - 코노피튬Conophytum 중의 한 녀석이 이상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녀석은 작은 입을 벌리고 수상한 그 무언가를 뱉어내고 있었다. 또르르 말려 있는 저것은 설마...

꽃대다! 꽃대가 나타났다!

작은 입에 물려 있던 꽃대에서 곧 작지만 화사한 꽃이 피어났다. 처음 코노피튬의 꽃을 발견했던 날의 아침은 정녕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아있다. 처음엔 덜컹, 하고 심장이 내려앉은 듯하더니 곧 머리 속이 발그레한 분홍빛으로 물드는 것 같은 기분. 세상 햇빛을 모두 받겠다는 충만한 의지로 활짝 피어있는 저 고운 얼굴. 

  

그 후로도 한동안 다닥다닥 붙은 얼굴에서 매일 한 두 송이씩 꽃이 피어났다. 이쯤 되면 이미 사진첩은 꽃 사진으로 가득해지고, 대화 도중 조금의 빌미만 생기면 간직해둔 꽃 사진을 꺼내어 자랑하기 일쑤였다. 꽃이 필 때마다 자랑하시던 엄마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 순간이다.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운 다육이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워지는 계절.

주로 봄에 탈피하는 코노피튬(하트 닮은 다육이, 축전 참고)은 여름 동안 차근차근 몸집을 키우고 가을이 오면 이처럼 예쁜 꽃을 피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모든 코노피튬이 무조건 여름에 탈피하고 가을에 꽃이 피는 것은 아니니 올 가을꽃이 안 핀다고 닦달하거나 걱정하지는 말자. (그래도 한 해를 그냥 지나쳐버리면 괜히 서운한 건 사실이다.)


우리의 하트 다육이 축전은 3년 간 봄마다 탈피는 열심히 해왔지만, 꽃은 딱 한 번만 보여주었다. 오렌지빛의 꽃이 불꽃처럼 팡! 하고 피었다 며칠 만에 져 버렸다. 야속하다 야속해.


물론 이 계절에는 코노피튬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다육이들이 꽃을 피운다. 곰발바닥 모양의 웅동자熊童子Cotyledon나 벨벳의 감촉을 닮은 부용Echeveria harmsii은 그 잎을 닮아 보송보송한 잔털이 난 꽃이 핀다. 


미파Faucaria bosscheana에서 민들레를 닮은 노란 꽃이 피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지내더니 어느 순간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루비앤네크리스Othonna capensis(또다른 이름으로 '진주목걸이' '루비네크리스' 등이 있다)에서는 깜찍한 노란 꽃이 핀다. 하지만 어릴 때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모습과 다 자란 모습의 간극이 큰 편이니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 두는 것이 좋다. 


고른 치아처럼 가지런한 화이트미니마Echeveria 'white minima' 얼굴 한가운데서 꽃대가 쑥 올라왔다. 이럴 때는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분명 예쁜 꽃을 보게 되는 건 기쁜 일이지만, 꽃대가 나오면 가지런하고 예쁘던 본체의 얼굴이 망가질 수도 있다.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꽃대는 점점 길어지더니 낚싯대처럼 길게 드리웠다.

또 다른 에케베리아Echeveria 교배종도 어사화御賜花처럼 화려한 꽃대를 올렸다. 좋다. 아주 좋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이걸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꽃대가 나오면서 중간이 들려버린 칠복수 

꽃이 피는 데는 많은 영양분이 필요하다. 그러니 꽃이 생기고 피우기까지 본체인 다육이에게 갈 영양분을 뺏기게 된다. 꽃대를 너무 오래 두었다가 본체에 변형이 오는 걸 몇 번 겪고 난 후에는 어느 정도 꽃을 감상한 후 미련없이 꽃대를 잘라주게 되었다. 


에케베리아 종의 꽃대는 유독 튼실해서 함부로 손대기 힘든 게 사실이다. 꽃대가 잘린 곳도 일종의 상처라서, 잘못 관리하면 세균이 침입할 수 있으니, 깨끗하게 닦거나 소독한 가위로 꽃대를 짧지 않게 잘라준 후 남은 꽃대가 마르고 나면 살살 잡아당겨 뜯어내어 관리한다.  


주인 맘도 모르고 여기저기 손을 들어 꽃대를 자랑하는 다육이들. 왠지 미안하다.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는 말자. 잘라낸 꽃대를 물에 담가 두면 얼마간 그 꽃을 감상할 수 있으니까.


올해도 꽃이 피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행여 한 해 또 한 해 넘긴다고 해도, 꽃이 피었던 날의 추억을 간직하며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참 예쁜 꽃이 피었더라고. 다음번에 또 예쁜 꽃을 피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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