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후 새로 마주한 베란다와 신경전을 벌이던 여름 끝자락, 끝내 무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아끼던 다육이 몇이 황망히 떠나가 버리면서 의도치 않게 다육이 선반에도 자리가 남아돌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하고 채워야 할지 손댈 수 없는 시간들이 흐르고, 이는 원천적인 고민을 불러왔다. 이렇게 식물을 기르는 것이 잘 하는 일인지, 장식품 모으듯 식물을 수집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명을 기른다는 행위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등의 생각이 차오르니 심경이 더 복잡해진다. 어른들이 이럴 땐 어떻게 하라 하셨더라? 그래, 몸을 움직이자. 움직이고 나서 생각해보자.
며칠 동안 일부러 얼씬 않던 베란다를 노려보았다. 할 것 투성이구나. 우선은 다육이가 빠져나간 화분부터 정리하자. 즐겨 쓰던 도자기 화분에 잔뜩 묻어 있던 흙먼지를 설거지하며 신나게 닦아내었다. 깨끗하게 씻은 화분을 쪼르륵 쌓아 올리고 쏟아지는 햇빛 아래 말려둘 때는 쾌감까지 느낄 지경이었다.
새 바람이 불어오는 틈을 타 모든 화분의 분갈이를 실시한 밤에는 3시간이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지는 마법 같은 경험을 하기도 했다. 아침에 마주한 선반을 보니 '그래, 이래야 내 베란다지'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시 정리한 선반은 지난봄보단 다소 듬성듬성 해졌지만, 여유를 찾은 것이니 좋은 거라 생각해보자.
이사 이후로 다육이보다는 관엽식물에 추파를 던지고 있던 터였다. 기존에 사용할 곳 없어 모아두었던 큰 화분을 하나둘 꺼내놓았다. 인터넷에서, 꽃시장에서 사모은 식물들이 속속들이 집으로 도착했다. 지금까지 잘 기르고 있는지 모르겠다면, 이제부터 잘 길러보면 되는 거지 무슨 고민이람!
100% 생김새 때문에 붙여졌을 이름의 거북이 알로카시아, 핑크빛 라인, 진한 초록색의 잎, 자줏빛의 뒷면 등 자연의 컬러 배합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만드는 진저.
거북이(거북등) 알로카시아 [알로카시아 아마조니카, Alocasia amazonica]
진저 [칼라데아 오나타, Calathea Ornata]
집에 하나씩은 있었다고 전해지며 추억을 불러일으키던 스파티필름은 집에 온 지 한 달도 안되어 하얗고 청초한 꽃을 피웠으며, 토토로가 쓰고 다닐 법한 셀렘은 중형종과 소형종 각각 한 포트씩 무사히 안착했다. 그 밖에도 2천 원, 3천 원쯤 하는 작고 예쁜 관엽식물들이 베란다 한자리씩 차지했다.
스파티필름 [스파티필럼, Spathiphyllum]
셀렘 [필로덴드론 셀로움, Philodendron seeloum]
햇살이 아주 좋던 어느 토요일에는 동네 꽃집에서 워터 코인[Water coin]을 만나 덥석 안고 돌아왔고, 색감과 느낌이 독특한 삼나무과의 블루버드[스노우화백, Chamaecyparis pisifera 'Boulevard'] 도 까다롭다는 우려를 이겨내고 잘 지내고 있다. 단돈 만 원도 채 되지 않는 몸값의 콩고[필로덴드론 콩고, Philodendron 'Congo'] 의 엄청난 크기는 집에 있는 모든 식물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땅에 화분을 놓았으니, 하늘에도 도전해보기로 했다. 베란다로 나가는 입구에는 틸란드시아Tillandsia가 매달렸고, 이사하면서 살짝 망가져 제 소임을 다하기 힘들어진 행거는 옷 대신 수염 틸란드시아, 러브체인, 루비넥크리스 등의 식물을 매달아두는 역할을 새롭게 담당하게 되었다. 플랜테리어Planterior? 행잉플랜트Hanging Plant? 우리 어머니들이 예전부터 자연스럽게 하고 계셨던 그것 아니었던가. 명칭이 조금 세련되어졌을 뿐.
햇살이 쏟아져내리던 어느 주말 베란다를 바라보다가 드디어 이 베란다와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음을 느꼈다. 더 이상 조바심도 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봐도 좋은 사이. 쪼르륵 모여서 햇볕을 쬐고 있는 나의 식물들과 아무 걱정 없이 그 식물을 바라보고 있는 나.
올 가을, 참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 작은 베란다 정원을 채워주는 식물들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