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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winkup Jun 08. 2016

선인장에서 꽃이 핀다

비화옥의 개화일기

사방이 뻥 뚫린 사막이라는 공간, 아무런 힘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감추기 위해 선인장의 잎은 가시가 되고, 흰 털이 되고, 동물의 피부처럼 변했다.



하지만 화려하게 나를 드러낼 시기가 왔다

소박한 느낌의 꽃을 피우는 다육이들과는 달리 선인장은 꽤나 화려한 꽃이 피는 편이다. 그동안 숨어 지내던 본체를 세상에 보여줘야 하는 시기, 번식기가 되면 선인장은 꽃을 통해 꽁꽁 숨겨놓았던 아름다움을 한 순간 모두 쏟아낸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찬란하고 반짝거리는 꽃을 본 적 있는가? 새빨간 꽃잎 속에 노랗게 영글은 수술이 유혹한다. 이러니 벌이니 나비가 찾아들 수밖에.

작년 봄, 부모님이 사오셨던 선인장이 바로 비화옥이었다

큰 뿔 세 개와 작은 뿔 하나를 달고 있는 선인장을 집어왔다.

비화옥이라는 이름의 이 선인장은 봄에 구하기 쉽다. 꼭 꽃시장까지 찾아가지 않더라도 재래시장 입구 한편에서 종종 팔리는 걸 보면 저렴한 몸값에 한 달 넘게 꽃구경을 시켜주니 어르신들도 좋아하시는 모양이다. 동그란 얼굴을 한 본체도 귀엽게 봐줄 만하다. 가시만큼은 누구에게 뒤질세라 억세서 조심해야 하지만.

비화옥 緋花玉 Gymnocalycium baldianum
봄에서 여름에 꽃이 피며, 꽃은 분홍색, 붉은색, 자주색 등이다.


두툼한 꽃망울에 건 기대는 며칠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집에 데려온 후 일주일 간은 꽃망울을 머금기만 할 뿐 도통 꽃을 피워내지 않았다. 그래, 우리 집은 동향이라 빛이 좀 부족하긴 해, 일단 기다리자. 유독 쏟아지는 봄 햇빛 아래 언제 필지 모르는 선인장 꽃망울을 두고 출근해야 하는 건 꽤나 아쉬운 일이다. 그런데 손꼽아 기다렸던 주말은 왜 이리 흐리기만 한 건지! 이런 날에 선인장은 절대 활짝 피지 않는다. 그렇게 2주가 넘게 흘러갔고, 비화옥의 꽃망울은 점차 힘이 빠진 모습으로 변해갔다.  

꽃망울은 머금었는데 왜 꽃을 피우지 못하니
애타게 기다린 주말마다 흐리고 비가 내렸다. 꽃은 피다 말았다.
나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던거니


나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설치하고 간 첫 번째 날의 동영상은 생각보다 배터리가 빨리 닳아서 몇 초 남아 있지 않았고, 두 번째 날에는 갑자기 흐려진 날씨에 비화옥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허락하지 않았던 터였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그 날, 비화옥은 멋지게 꽃을 피웠다.

(별 거 안했는데) 마치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된 기분
아쉽지만 이번 봄엔 여기까지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비화옥 선인장은 보통 2천원~3천원 사이로 살 수 있다.

아이패드 카메라의 타임랩스 기능으로 촬영한 개화 동영상은 총 32초 정도로, 원래는 해가 사라지고 꽃이 살짝 지는 모습까지 담겨있었다. 햇빛의 움직임으로 추측하건데 6시간 정도는 찍힌 것으로 보였다.

햇빛이 잘 드는 집에서는 훨씬 더 큰 꽃이 피며, 한번 꽃이 진 후도 몇 번에 걸쳐 꽃이 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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