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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 May 03. 2023

My foolish heart

*inspired by Tony Bennett, Bill Evans

탁. 현우가 마지막으로 맨 구석에 있는 테이블의 랜턴을 켰다. 열 평 남짓한 바 밤서재가 내내 잠들어 있다가 수십 개짜리 전구색 눈을 하나씩 하나씩, 느릿느릿 떴다. 이럴 때 밤서재는 꼭 신비로운 생명체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 생명체가 완전히 눈을 뜨고 나면 고요하게 바 안쪽에서 린넨으로 잔을 닦는 주영으로 변모하는 것 같았다.

현우가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빌 에반스가 피아노를 치고 토니 베넷이 노래하는「My foolish heart」가 흘러나왔다. 주영은 린넨을 손에 쥔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주영은 바 문을 열기 전 항상 이 곡을 처음으로 틀고 곡이 끝나기까지 4분 51초 동안 눈을 감는다. 현우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 유일하게 주영을 오롯이 눈에 담을 수 있는 4분 51초.      

언젠가 현우는 주영에게 매일같이 이 곡을 첫 곡으로 트는 이유를 물어봤다. 주영은 현우의 눈을 찬찬하게 바라보다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좋아하거든.”

딱 한마디, 겨우 다섯 글자 때문에 현우 머릿속에는 평생 들어 온 모든 음악이 사라지고 오직 이 곡만이 남았다.

“How white the ever constant moon, take care my follish heart.”

새하얗게 달이 뜬 밤, 이 곡을 들으며 현우는 몇 번이고 카톡 대화창 앞에서 서성거렸는지 모른다.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휴식」으로 꾸며진 주영의 프로필 사진을 얼마나 열었다 닫았을까. 부탁할 수도 없는 마음인 줄 뻔히 알면서, 그렇게 밤을 헤다가 까무룩 잠든 날이 며칠이나 되는지.     


우우웅, 요란한 진동 소리가 현우를 새하얀 달밤의 기억에서 어슴푸레한 조명으로 채워진 바로 데려다 놓았다. 주영은 느릿느릿 고개를 움직이며 진동이 울리는 곳을 찾고 있었다. 늘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두고는 어딨는지 알지 못해 찾는 게 주영의 일상이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현우는 나무늘보가 떠올랐다.

진동 소리가 야단스러운 걸 보면 핸드폰은 무언가와 붙어 있거나 어딘가에 어정쩡하놓여 있는 게 분명했다. 나무로 만든 테이블이나 바 쪽은 아닐 거고, 주방이려나 싶어 현우가 호다닥 바를 돌아 주방으로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은 싱크대 옆 식기 건조대에 접시와 함께 놓여 있다. 대체 왜 이런 데다가 핸드폰을 두는 건지, 현우는 혼자 피식 웃고는 마치 핸드폰이 주영이라도 되는 듯 사랑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액정을 보니 요란한 진동의 주인공은 ‘민재 씨’였다. 순간 현우는 포식자와 마주친 피식자처럼 몸이 굳었다.

“거깄었네.”

주영의 낮은 목소리가 얼음땡 주문인 것 마냥 현우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머쓱하게 웃고는 핸드폰을 주영에게 건넸다.

“응, 민재 씨.” 하는 주영의 목소리에 현우는 주영의 남편 민재를 처음 본 날이 떠올랐다.     


주영의 바에서 일을 한 지 아홉 달쯤 되었을까. 현우는 그날도 으레 가게 문을 열기 전에 주영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주영은 술만큼이나 차도 좋아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냥 주영이 좋았던 현우에게 그 시간은 화양연화였다. 주영과는 어떤 이야기도 잘 통했다. 음악과 책, 미술과 영화, 여행까지. 스물넷 현우에게 서른셋 주영은 원하는 모든 이야기가, 그것도 제 취향에 꼭 맞는 모양으로 가득한 서재 같았다. 주영의 추천으로 현우가 한참 빠져 읽고 있던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찰랑, 하고 문에 달아놓은 풍경이 울렸다.

가게 문을 열기까지 30분은 넘게 남아 있었다. 현우는 주영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애틋해서 항상 출근 시간보다 1시간쯤 일찍 와 있곤 했으니까. 커다란 키에 선선해 보이는 남자가 바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인가 싶어 현우가 일어나려는 찰나 주영이 입을 열었다.

“민재 씨?”

그때부터였다. ‘민재’라는 이름 앞에서 현우가 얼어붙은 건.  

주영은 처음에 현우도 ‘현우 씨’라고 불렀다. 나이 차와 상관없이 똑같은 어른으로서 상대를 대하려는 주영의 태도에서 비롯한 호칭이었다. 그러다 현우가 하도 거리감이 느껴진다, 어색하다 노래 노래를 하니까 언젠가부터 ‘현우야’라고 고쳐 불렀다. 현우는 그게 좋았다. 주영과 자신 사이에 거리감이 줄어든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주영이 부르는 ‘민재 씨’는 명백히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그 순간, 현우는 민재가 주영의 남자라는 걸 깨달았다.

“현우 씨죠? 주영 씨가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들었어요. 고마워요.”

민재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심지어 호의를 가득 담아 현우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 태도에 현우는 스스로도 당황스러울만치 화가 치밀었다. 주영이 결혼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자기 마음을 내비쳐 주영을 곤란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현우는 그저 곁에서 주영을 바라보고 주영이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듣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었는데, 민재를 본 순간 깨달았다. 그 믿음은 어차피 꺼내 놓을 수 없는 마음이라는 걸 알기에 애써 스스로를 속여 온 주문이라는 걸. 아무리 순정과 동경이라는 색깔로 두껍게 덧칠해도 기어코 캔버스에서 꿈틀거리며 제 색을 드러내는 건 욕망이라는 걸.

꽤 낮은 주영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성민제가 연주하는 「Gymnopedie No.1」의 첫 선율이 떠올라 설렌다고만 여겼는데 사실은 그 소리를 내는 입술에 입맞추고 싶었다. 주영이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때면 나무늘보가 떠올라 사랑스럽다 여겼는데 사실은 그 몸을 꽉 끌어 안고 싶었다. 언제나 숏컷에 티셔츠, 청바지 차림인 주영을 소년 같다 여겼는데 사실은 티셔츠 목둘레 너머로 살짝 드러나는 쇄골과 자그마하지만 리듬감이 흐르는 실루엣을 볼 때마다 더운 피가 솟구쳤다. 주영을 보는 것만으로 좋고 주영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던 현우의 세상은 그날 와르르 무너졌다.


주영이 고요히 응, 응 거리며 몇 마디 대답을 사이 그 틈을 토니 베넷의 목소리가 채웠다.

"Her lips are much too close to mine, beware my foolish heart.

But should our eager lips combine, then let the fire start.     

For this time it isn't fascination, or a dream that will fade and fall apart.

it’s love this time.

it’s love my foolish heart."     

민재와 통화하는 주영의 입술은 가까이에 있지만, 그 입술을 너무 갈망하지만 이 어리석은 마음은 결코 불길이 될 수 없겠지. 서서히 희미해지다 사라져야 하는 꿈일 뿐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조심하고 조심하더라도 나는 결국 이 마음에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밖에 없겠지. 현우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곡이 처음부터 다시 재생되었다.

"The night is like a loverly tune, beware my foolish heart.

How white the ever constant moon, take care my foolish heart."

주방 너머로 나 있는 자그마한 창문 사이로 새하얀 눈썹달이 보였다. 현우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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