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이야기]
해마다 미국에서는 아카데미 시상식 전날 최악의 영화와 영화인을 발표하는 이색적인 행사가 열려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른바 ‘골든 라즈베리상 시상식 Golden Raspberry Awards’(일명 라찌상). 올해로 37회를 맞이하며 아카데미 시상식 만큼이나 세계 영화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시상식이다. 카피라이터이자 작가로 활동했던 존 윌슨이 그의 자택에서 지인 수십 명과 함께 ‘티켓값 1달러도 아까운 영화’를 뽑는 식으로 진행했던 것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발전했다. ‘최악의 영화’ ‘최악의 배우’ 등의 부문에 이름을 올린 이들 중 일부는 쿨한 모습을 보이며 직접 시상식에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골든 라즈베리상에 거론됐다는 사실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기며 참석을 거부한다. 무엇보다 최고의 영화와 영화인을 선정하는 아카데미 시상식과 뚜렷한 대비를 이루며 한 해 동안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작품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해볼 수 있어 좋다. 극장을 찾아갔다가 기대 이하의 완성도에 실망했던 관객의 언짢은 기분도 시원하게 풀어준다. 이번에는 ‘배트맨 대 슈퍼맨:저스티스의 시작’과 ‘수어사이드 스쿼드’ 등 DC코믹스의 부활을 노렸던 작품들이 후보에 올라와 조롱거리가 됐다.
2017년 최악의 영화상 누가 차지할까
올해 골든라즈베리상 시상식은 2월 25일에 개최된다. 역시 아카데미 시상식 바로 전날이다. 후보 발표도 아카데미 시상식 본상 후보 발표 직전에 맞춰 진행되는데, 이번에는 24일을 기점으로 각 부문 ‘최악의 후보’들을 공개했다.
이번 시상식 후보 중 단연 눈길을 끄는 영화는 ‘배트맨 대 슈퍼맨’이다. 최악의 작품상, 최악의 남우주연상(벤 애플렉, 헨리 카빌), 최악의 감독상, 베끼기상, 최악의 각본상, 최악의 스크린 콤보상(벤 애플렉, 헨리 카빌), 최악의 남우조연상(제시 아이젠버그), 최악의 프리퀄&시퀄&리메이크&스핀오프상 등 무려 8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배트맨과 슈퍼맨의 대결’이란 흥미진진한 소재에다 가공할만한 액수의 제작비로 화제성을 높여놓고 막상 개봉 후 욕이란 욕은 모조리 독차지했던 비운의 영화다.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캐릭터, 개연성 없는 전개 등으로 혹평을 들었다. 그놈의 ‘인지도’ 때문에 세계적으로 9억 달러에 상당하는 돈을 벌어들였는데, 완성도 떨어지는 영화로 관객몰이를 했다는 사실이 특히 골든 라즈베리 심사위원들의 심기를 건드린 듯 하다. 호화 캐스팅에 천문학적 액수의 제작비로 관객을 홀려 돈벌이를 하면서도 막상 완성도는 기대 이하인 영화, 바로 이런 작품들이 골든 라즈베리상의 주요 먹이감이 된다.
‘쥬랜더 리턴즈’도 최악의 작품상가 최악의 남우주연상(벤 스틸러), 최악의 남우조연상(윌 패럴, 오웬 윌슨) 등을 비롯해 9개 부문 후보가 돼 올해 골든라즈베리 최다 노미네이트라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갓 오브 이집트’와 ‘인디펜던스데이 리써전스’ 역시 최악의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등 각종 부문 후보에 올라 최다노미네이트작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
‘배트맨 대 슈퍼맨’과 함께 DC코믹스 히어로 세계의 부활을 노렸던 ‘수어사이드 스쿼드’도 최악의 남우조연상(자레드 레토)과 각본상 부문 후보가 됐다. 개봉 당시 마고 로비가 연기한 캐릭터 할리 퀸을 제외하고는 스토리와 등장인물 등 어느 하나 칭찬을 끌어낸 요소가 없었던 영화다. 충분히 골든라즈베리상을 수상할만한 작품이다.
그 외에도 ‘닌자터틀2’의 메간폭스와 ‘마더스 데이’에 출연한 줄리아 로버츠, ‘얼리전트’의 히로인 나오미 왓츠가 최악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눈길을 끈다.
‘스노든’의 니콜라스 케이지,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출연한 조니 뎁도 최악의 남우조연상 후보가 됐다. 세상이 알아주는 연기파라고 해도 못한 건 못한 거다.
한 쪽에서는 ‘라라랜드’ ‘컨택트’ 등 호평을 받은 영화, 그리고 라이언 고슬링, 덴젤 워싱턴, 나탈리 포트만, 메릴 스트립 등 명배우들이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올라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아카데미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고 골든 라즈베리상 후보가 된 영화와 영화인들은 입맛이 쓰다. 이번에는 쿨하게 시상식장을 찾아 ‘최악의 상’을 당당하게 받아갈 이가 있을까.
문화 다양성과 균형 유지에 필요한 이색 시상식
각 부문별 최악의 후보를 선정하고 그들에게 초청장까지 보내 오프라인에서 시상식을 개최한다니. 대한민국 문화계 현실에선 절대 나올 수가 없는 발상이다. 감독이 촬영장에서만 권력을 가지는 게 아니라 편집권까지 가지고 영화 전반을 쥐락펴락하는 비정상적인 환경이 자리잡힌 데다 배우들도 실력에 비해 과대포장돼 오만한 이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을 ‘최악의 후보’로 선정했다가는 ‘쿨하게’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피소당하기 십상이다. 형편없는 영화를 내놓고서도 ‘열심히 만들었으니 한번 봐 달라’는 말을 하는 뻔뻔한 영화인들도 상당수다. 그래놓고선 혹평이 쏟아지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 탓을 하곤 한다. 특히나 요즘처럼 비평에 대한 개념이 희석돼 콘텐트 생산자와 소비자가 1대 1로 대면하다시피 하는 분위기에서는, 전문가들의 ‘혹평’을 ‘사랑의 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가 드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더욱 더, 골든라즈베리상과 같은 행사의 국내 도입 필요성이 절실해진다. 영화 뿐 아니라 TV 부문까지 영역을 확대해 꾸짖을 부분은 꾸짖고 대중문화의 하향평준화를 막아야 한다. 장난기를 곁들여 선동적인 문구를 써봤는데 그만큼 우리나라 대중문화계도 쿨하게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물론, 할리우드라고 해서 골든라즈베리처럼 조롱 섞인 행사에 관대하진 않다. 나름대로 애써 만든 작품이 ‘최악’이란 타이틀로 불리고 자기 명예를 걸고 출연한 작품에서 보여준 연기가 ‘최악’으로 꼽히니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종종 골든라즈베리상 시상식에 나타나 상을 받고 너스레를 떠는 영화인들이 있긴 하다.
대표적인 예가 산드라 블록이다. 당시 산드라 블록은 ‘올 어바웃 스티브’(09)로 골든 라즈베리 최악의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됐다. 상당히 기분 나쁜 상황인데도 산드라 블록은 골든 라즈베리상 시상식에 참석해 상을 받고 쿨하게 소감까지 밝혔다. 물론, 이것도 특수한 상황. 마침 산드라 블록이 다음날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같은 작품으로 여우주연상 후보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쿨한 척’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산드라 블록은 골든라즈베리상을 받은 다음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 외 ‘캣우먼’의 주연배우 할리 베리, 또 ‘쇼걸’의 감독 폴 버호벤도 골든라즈베리상 시상식에 직접 나타나 트로피를 받아갔다. 작품과 연기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시선에 따라 다른 견해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힘들지만 애써 인정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역대 최다 수상자는 실베스터 스탤론이다. 무려 10번이나 수상해 ‘최악의 영화인’이란 불명예를 떠안았다. 하지만, 이후 ‘크리드’로 만회상 후보로 지명돼 상당 부분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만회상은 과거 골든 라즈베리상에 거론된 이들 중 좋은 활동을 보여준 이들을 대상으로 응원의 메시지를 담아 건네주는 상이다. 마돈나도 9번이나 이 상을 받아 화제가 됐다. 아담 샌들러 역시 골든 라즈베리상의 단골손님으로 6차례나 수상했다. 지난해에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최악의 작품상을 비롯해 각 부문을 휩쓸었다.
골든 라즈베리상이 그저 흥미성에 치우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핵심구성원을 제외하고도 무려 600여명의 심사위원단을 관리해 공정한 평가를 하려 애쓴다. 무엇보다 할리우드 내에서 상업성만 내세우며 ‘질 나쁜 영화’를 만들어내는 이들을 견제하고 발전을 도모하자는 취지가 강하다. 그래서, 이런 시상식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할리우드의 쿨한 분위기가 부럽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