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이야기]
'서양귀신'의 대표적인 모델로 알려진 '좀비'가 바다 건너 아시아 전역에, 이젠 대한민국까지 널리 서식지를 넓히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대중문화 콘텐트의 소재로 쓰이다가 일본 시장에도 진출한 것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이어 국내에서도 2016년작 '부산행'을 기점으로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와 웹툰 등 대중문화 콘텐트가 자주 만들어지고 있다. 물론 '부산행'이 나오기 전에도 좀비를 등장시킨 콘텐트가 만들어진 적은 있지만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경우는 없었다. 이제는 넷플릭스와 한국 제작진이 손을 잡고 좀비 드라마까지 만들어내니 '부산행' 이후 국내에도 이 소재에 대한 수요층이 탄탄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스크린을 벗어나 1차적으로 국내 시장을 겨냥해 만든 드라마에 좀비를 등장시킨 건 이번이 처음이라 성공 여부에 유독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이다.
'킹덤', 국내 최초 좀비 소재 드라마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좀비 드라마 '킹덤'이 출사표를 던지면서 국내 콘텐트 시장은 들썩이기 시작했다. 글로벌 거대 OTT 넷플릭스가 만들고 그들의 플랫폼에서 공개되는 한국 드라마, '시그널' 등을 집필하며 국내 톱 클래스로 들어간 작가 김은희의 존재감, 충무로에서 히트작 '끝까지 간다'를 연출한 김성훈 감독, 그리고 류승룡-주지훈-배두나 등으로 이어지는 스타급 출연진 등 주목받을 요소가 다분한 작품이다. 첫 시즌 공개 전부터 시즌2 제작을 확정했으며, 6부작으로 기획된 시즌1에만 무려 200여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됐다. 국내 뿐 아니라 넷플릭스가 공략하는 글로벌 시장에도 공개되는 만큼 한국 콘텐트의 경쟁력을 살펴볼 수 있으며 동시에 넷플릭스의 저력을 다시 한번 평가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 와중에 콘텐트 제작자나 평자들의 시선을 끄는 요소가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이 드라마의 소재인 조선판 좀비다.
'킹덤'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나라 곳곳에 퍼져나가는 좀비 바이러스와 이에 맞서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 조선 왕실 내에서 펼쳐지는 음모 등 한국 사극의 기본적인 흥행요소에 '서양귀신' 좀비를 더해 폭넓은 세대를 끌어안겠다는 야심을 보여준다. 양경일-윤인환 작가의 만화 '버닝헬 신의 나라'를 원작으로 했으며, 이미 이 만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김은희 작가가 함께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말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좀비 액션영화 '창궐'이 처참하게 흥행에 실패한 터라 유사한 느낌의 '킹덤'이 공개 직전부터 우려의 시선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창궐'의 패인은 분명 미약한 완성도 문제였을 뿐 소재 이슈는 아니다. 오히려 소재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첫 번째 한국판 좀비물'로 충분히 화제성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반면, '킹덤'은 이미 필력이 증명된 작가를 비롯해 믿을만한 제작진과 출연자들로 진용을 꾸려 '창궐'과는 다른 길을 걷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얻고 있다.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의 특성상 안방극장용 드라마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한국 드라마로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좀비물인데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택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킹덤'의 시도는 장르 확장 차원에서 가치가 있다. 국내 방송사 채널을 통해 안방극장에 공개되는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에서 평가의 관점을 달리해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킹덤'의 흥행 결과는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어떤 쪽이든 한국 드라마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뛰어다니는 좀비를 등장시킨 영화 '28일 후'
좀비, 서양에서 출발해 아시아권까지 장악
'부산행'이 충무로 메이저 영화 중에서는 처음으로 좀비를 내세워 흥행에 성공한 케이스였지만, 그 전에도 독립영화 진영에서는 좀비를 소재로 택하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띄었다. 부천국제 판타스틱영화제 등에 상영돼 화제가 됐던 2010년작 '이웃집 좀비'가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좀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2008년작 'GP506'도 넓은 의미로 봤을 때는 좀비영화의 일종이다. 죽지는 않았지만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돼 산 자들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 괴물들의 모습은 분명 좀비와 유사했다.
웹툰 쪽에서는 이미 많은 좀비물이 만들어졌고 또 지금도 새로운 좀비물이 나오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보다 비용 대비 흥행성과에 대한 부담이 덜하고 폭넓은 표현 영역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학교는', '당신의 모든 순간', '데드 데이즈', '좀비 신드롬', '죽은 자들의 도시에서', '좀비딸', '데드 라이프', '사람냄새'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편수가 많다. 수가 많은 만큼 제각각 다양한 설정을 동원해 좀비를 다루고 있다. 좀비라는 등장 캐릭터를 제외하고 본다면 성장드라마, 휴먼 드라마, 하드보일드 액션, 코믹, 사회 비판물 등 장르도 여러 종류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내용이 다양하다. 좀비를 등장시킨다는 이유 만으로 유사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장르적 느낌까지 달리 할 만큼 다방면으로 변주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좀비라는 캐릭터가 단순히 서양의 B급 호러영화 소재로 활용되던 차원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좀비는 본토에서 이미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좀비라는 캐릭터가 널리 알려진 건 조지 로메로 감독의 1969년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흥행에 성공하면서부터다. 죽은 시체가 갑자기 살아나 사람들을 공격하고 이 시체의 공격에게 물리거나 한 사람들이 바이러스로 인해 같은 괴물로 변해 아수라장이 된다는 설정으로 모든 좀비물의 기초적인 베이스를 제공한 작품이다. 그 뒤로 이탈리아에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재편집해 '좀비'라는 타이틀을 붙여 개봉했고 이듬해 '좀비2'까지 나오면서 사람들을 공격해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시체 캐릭터가 좀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초기에 영화에 등장한 좀비들은 강한 공격성을 띄고 있지만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 적당히 피해갈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후 대니 보일 감독의 2002년작 '28일 후'에 놀라운 속도로 뛰어다니는 좀비가 등장하면서 판이 바뀌었다. 뛰어다니는 좀비를 보여준 콘텐트는 그 전에도 나오긴 했지만 '28일 후' 만큼이나 영향력이나 파급력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뛰는 좀비를 세상에 내보낸 건 '28일 후'라고 봐야 한다.
그 뒤로 좀비는 놀라운 속도감까지 갖추게 됐다. 그리고 괴력을 지닌 좀비나 지각 능력을 갖춘 좀비, 연애 감정을 가진 좀비, 죽기 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좀비 등 폭 넓게 변주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의 2013년작 '웜바디스'는 한 여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좀비의 순애보를 보여줬고, 현재 네이버에 연재되고 있는 '데드 라이프'는 죽어서 좀비가 된 인물이 인간의 마인드를 잃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액션을 강조하기 위해 좀비를 등장시키는 콘텐트의 경우 이 황당한 바이러스로 인해 시작된 재난 자체에 초점을 맞춰 보는 이들의 공포심리를 자극한다.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전파된 좀비 바이러스의 무서움을 보여준 '월드워 Z'의 에피소드, 그리고 기차를 배경으로 한 '부산행' 등을 떠올리면 된다.
이처럼 좀비가 뱀파이어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캐릭터로서의 탁월한 매력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원한 풀이에 집착하는 국산 처녀귀신이나 한때 중화권과 한국시장에서 인기를 끌던 강시가 활동 영역을 확장하지 못했던 것은 타 문화권에 수요층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의 매력과 설득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의 동명히트작을 리메이크한 2018년작 '여곡성'을 보면 이제 한국 관객에게도 시들해진 원한 풀이를 언제까지 원안 그대로만 사용하려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