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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cony Review Feb 04. 2023

와이프를 기억하며

세번째 기일

확실히 첫째 기일이랑 내 감정은 달라졌지만, 그래도 와이프의 글은 아직도 울림이...


2015년 3월 21일 

제왕절개 가능성이 높아 (다담이가 거꾸로 자리잡은 바람에)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걱정이 많으시네. 우리 다담이는 막상 편하게 앉아 있을텐데, 그치?


2017년 7월 15일 

엄마들은 섬이다. 한없이 고립되고 끝없이 가라앉는 존재. 어린 아이를 돌보고 있는 내 친구들 모두 힘내.


2018년 5월 21일

오늘,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 이틀 전 마음먹고 한 눈썹문신의 앞머리가 조금 옅어져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 좋다. 어제 저녁엔 변기에 앉아 혼자 큰일을 보던 예섭이가 이렇게 외쳤다. “나두 털이 나고있어! 아빠가 되려나봐! 할아버지가 되려나봐!”


2018년 7월 11일

바닷가에 오니 새삼스레 건강한 사람들, 아팠던 흔적따윈 없는 매끈하고 아름다운 몸에 수영복을 걸 치고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사람이 유난히 많아 보인다. 그러고보면 겨울에 모두 털모자와 목도리로 꽁꽁 무장하고 다닐 때는 건강한 사람들과의 이질감을 잘 못느꼈더랬다. 더운 여름날 머리를 질끈 묶어버리고 목이 깊게 파인 후들후들한 티셔츠를 입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지금 이 계절이 어찌보면 간접적인 이 병을 나에게 와닿게 한다.


2018년 9월 15일

세상 모든 병이 다 힘들겠지만, 4기 암투병이 힘든 이유는 모든이의 기대와 좌절이 수없이 반복되며 작은 희망까지도 짓밟아버리기 때문일거야. 암투병 자체가 하나의 전쟁이라면 각각의 다른 치료는 작은 각 개전투들이랄까. 1년 반도 안되는 시간동안 벌써 다섯가지 약 조합이 실패했지만 엄마와 가족들은 약 하나 하나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던지. 특히 아빠는 엄마가 쓰게되는 약마다 엄청난 리서치를 통해 엄마에게 꼭 들을수밖에 없다는 근거들을 나열하면서 비관적인 엄마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줬어. 엄마는 그동안 살면 서 중요한 결과를 앞두고 있을 때마다 실망하는게 무서워서 아예 기대를 안하는 전략을 주로 쓰는 편이었거 든. 아빠는 엄마에게 부정적인 생각 그만하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매번 얘기해. 엄마도 물론 긍정적으로 힘 내고 싶은데,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날벼락같은 소식을 듣는 것은 얼마나 겁나는 일인지... 아무래도 엄마가 아빠보다 훨씬 겁쟁이임이 틀림없나보다. 이왕이면 아빠의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을 닮으면 좋겠다. 살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시련들을 겪게 마련이지만 그럴때마다 가장 필요한 건 깊이 생각하는 이성과 판단력보다는 내앞에 닥친 삶을 이끌어가는 일상적 에너지인것 같아. 


2019년 1월 9일

지독한 짝사랑이 이런 느낌일까? 내려놓자, 포기하자, 싶다가도 눈부신 햇살, 파란 하늘, 그리고 사랑 하는 가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다짐이 단번에 무너져내린다. 삶이 보내주는 눈빛 한 번에, 미소 하나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리는 나. 스스로 삶을 놓아버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심히 그려보곤 한다. 그러면 조금 더 쉽게 미련없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삶은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답다.


2019년 1월 22일

나보다 힘든 사람을 배려하기란 쉽지 않다. 건강한 사람은 아픈 사람을 100% 이해하고 배려할 수 없 고, 아픈 사람들끼리는 언뜻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처럼 보여도 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모두 ‘나에게는 닥치지 않았으면’ 하는 상황을 보며 내 상황에 안도하거나, 혹은 불안해 한다. 순수한 연민이란 존재할 수 있는 감정일까? 누군가의 불행을 보고 내 처지를 감사해하거나 조금의 위안이라도 받지 않고 - 온전히 그들이 느끼는 고통과 부당함에 같이 화내고, 기꺼이 함께 겪어줄 의향이 우리 에겐 있는 것일까?


2019년 6월 11일

구름이 뭉게뭉게 하늘이 너무 예쁘고 공기가 좋아서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서 아트센터 벤치에 앉았 다. 도시락 부대가 옆에 앉으려고 해서 이만 여기까지...


2019년 7월 12일

 처음 가보는 동네의 어느 커피숍에서 마음의 응어리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절대 사그러질 것 같지 않던 내 분노, grudge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사람 사이의 일은 마법같은 것...


2019년 12월 5일

 ME. I am a lot of things. 여자. 한국사람. 엄마. 아내. 딸. 친구. 누나. 며느리... 예쁜 것을 좋아하지만 이북 출신 할머니 할아버 지의 영향으로 지극히 실용주의적인. 물건을 오래 쓰는 것을 좋아하고, 조악하고 허접한 공산품을 싫어한다. 바삭한 식감을 좋아하고 달달한 디저트와 계절과일을 즐긴다. 한식도 좋아하지만 들쩍지근한 간장소스는 싫어... 책을 좋아하고 TV 예능이나 드라마는 별로 즐기지 않는다. 대중가요도 마찬가지... 깊이있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무엇보다 귀하고, 의미없는 수다나 만남은 꺼린다. 골목길 탐험을 좋아하고 새로운 전시는 꼭 가보고 싶어하는 나. 그런 내가, 나의 세계가 사그러져간다. 빛을 잃는다. 하나씩 하나씩 나를 규정하는... 섬이 아득해진 다. 불이 꺼진다. 불꺼진 나. 그조차 나겠지만 그 초라함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밤에는 간접조명만 켠 채 스피커에 연결된 라디오를 들으며 책을 읽고 바디로션을 발랐다. 행복했다.


와이프를 기억하며...


20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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