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올해가 백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글을 보고 이참에 나도 100일짜리 챌린지나 한 번 해볼까 싶었다. 100일 동안 매일 꾸준히 할 만한 게 뭐가 있나. 하루에 만 원씩 모아서 일년 동안 수고한 나한테 선물을 줄까?100만 원으로 뭘 하지? 한참 고민하다가 그냥 하고 있는 루틴이나 잘 유지하기로 했다.
루틴과 일상의 차이점이 뭘까. 나의 정의는 이렇다.
출근, 집안일, 끼니 때우기 등등. 해야 하는 일을 해내는 건 일상. 일상에서 짬을 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공식 일정으로 만드는 건 루틴.
그니까 루틴은 샐러드 위에 추가하는 토핑 같은 게 아닌가 싶다. 맛없는 풀을 먹어야 할 운명이라면. 두부구이, 연어, 치즈, 치킨텐더 같이 맛있는 걸 얹어서 조금은 덜 괴롭게 살려는 꼼수. 그래야 일상에 흥미를 잃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계속 풀만 먹으면 금방 포기하고 싶어진다.
여기까지 생각한 뒤에, 일기장을 펼쳐 매일 하고 싶은 일을 쭉 적어 봤다.
□ 일기 쓰기
□ 산책
□ 햇볕 쬐면서 티타임
□ 노을 보기
□ 책 한 꼭지씩 읽기
□ 모닝 요가
그리고 얘네들도 공식 일정으로 인정해 주기로 했다. 출근하기, 콘텐츠 마감하기, 기획안 작성하기와 똑같이 중요한 일정. 해야 할 일만 빼곡히 적혀 있던 나의 to do list에 하고 싶은 일도 함께 적힌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이것이 올해의 수확이다. 물론 매일 루틴을 지키는데 성공했다는 뜻은 아니다. to do list에 매일 루틴을 적었다는 것이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깨달은 게 몇 가지 있는데 우선 루틴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라기 보단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마감이 코앞일 때는 아침 요가 하는 30분이 아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30분 늦게 컴퓨터 앞에 앉는다고 큰일이 나는 게 아닌데도. 그렇게 아낀 30분을 쓸데없는 SNS 가십 보느라 날려버리면서도.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나는 ‘장비빨’을 세우는 방식으로 해결하곤 한다.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을 때 비싼 노트나 펜을 샀던 것처럼. 물건의 힘에 기대는 것이다. 새 노트를 보면 얼마간은 뭐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그 힘으로 계속 뭐라도 썼다.
매일 하고 싶지만 어쩐지 안 해버리는 루틴을 계속하기 위해 이번에도 나는 장비빨을 세웠다. 요가 할 때 피울 인센스와 홀더를 사고, 색이 고운 요가복을 샀다. 산책용 가방과 신발도 샀다. 티타임을 위한 원두와 머그컵도. 루틴을 시작하기 전에 일종의 의식처럼 장비를 장착(!)한다. 향 한 개비를 피우는 것만으로 마음의 속도가 달라진다. 잠옷에서 요가복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에 모닝요가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 아니라 지켜야 할 루틴이 된다.
태어난 김에 살긴 싫다. 대충 살기도 싫고. ‘잘’ 살고 싶다. 그런데 ‘잘 살고 있다’는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일단 일에서 오는 건 아닌 것 같다. 운 좋게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고 만족할 만한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회사 일에 매몰된 시기를 지나고 나면 ‘뭔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안정적인 수입이 주는 달콤함도 상사의 인정이나 업무적인 성취도 일상의 공허함을 달래주진 못 한다. 무조건적인 휴식 또한 잘 살고 있다는 감각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생산적인 일은 조금도 하지 않고 과자봉지처럼 널브러져 그저 쉬기만 하는 주말은 또 그것대로 괴롭다. 경험상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매일 또박 또박 해내는 루틴이 있는 일상에서 잘 살고 있다고 느낀다.
요즘엔 ‘투 두 메이트’라는 앱으로 일정 관리를 한다. 해야 할 일은 주황색 폴더에 넣고, 하고 싶은 일-루틴은 초록색 폴더에 넣는다. 일정을 완료하면 빈칸을 색칠할 수 있다. 초록색 폴더를 전부 다 색칠한 날은 아주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잠든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참고로 초록색 폴더의 이름은 ‘정원 가꾸기’다. 정원을 가져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공간은 며칠만 소홀히 해도 잡초와 잡동사니로 뒤덮여 아주 몹쓸 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