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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Sep 06. 2021

MBTI가 바뀌었다

은둔 시즌엔 사람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으므로 산책으로 애정을 충전한다.

최근에 MBTI가 바뀌었다. 외향성과 내향성을 반반씩 가지고 있어서 시기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한다. 아무한테나 꼬리 흔드는 성격 좋은 댕댕이 같을 때도 있고 ‘외롭지만 인간 싫어’ 모드(어쩌라는 걸까)로 은둔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양쪽 상황 모두 다정과 친절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론 같다. 


은둔 시즌엔 사람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으므로 산책으로 애정을 충전한다. 혼자 걸으면 누군가와 대화할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지만 의외로 귀여운 만남이 높은 빈도로 발생한다. 가까운 이와의 만남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이지만, 잘 모르는 이와 순간적으로 주고받는 호의는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요즘 나는 다소 무책임한 친절을 남발할 수 있는 가벼운 사이에서 자주 위로 받는다. 


산책 도중 발생한 귀여운 사건들을 얼른 일기로 쓰고 싶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발걸음이 두 배로 빨라진다(안 그래도 팔척장신이라 보폭이 넓은데!). 나는 집에 먹을 게 없을 때만큼이나 일기거리가 없을 때 시무룩해지는 사람이라, 산책한 날에는 마음이 부자다. 그래서 눈앞에 복권 가게가 있어도 로또를 사지 않는다.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를 읽고 자란 어른/2021.08.15

오늘따라 발목이 아파서 산책 도중 동네 빵집 들러 잠깐 쉬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동그란 안경을 쓴 아기가 막 뛰어 들어왔다. 

“저기, 주문 할 게요! 아이스 라떼인데 얼음을 많이 넣어 주세요! 엄마 꺼예요!”

아직 어려 보이는데. 벌써 심부름을 하네. 너무 똑똑하고 귀엽다. 속으로 생각하는 찰나에 아기가 곤경에 처했다. 

“근데 어쩌지. 300원이 부족한데.”

나는 잠시 고민했다. 도와줘도 될까? 마침 주머니에 어제 음료수 뽑아 먹고 남은 300원이 있긴 하다. 오지랖은 아닐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급격히 시무룩해진 아기가 빵집 밖으로 나가려고 해서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를 읽고 자란 어른은 곤경에 처한 어린이를 모른 척 하지 않아! (이 책에 실린 단편 ‘이해의 선물’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4살짜리 어린 아이가 돈 대신 ‘버찌씨’를 내자, 아이의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었던 사탕가게 주인은 “돈이 남는다”며 거스름돈으로 2센트를 돌려준다)  

“저기…! 제가 마침 300원이 있어서요.”  

카운터로 쭈뼛쭈뼛 걸어가서 300원을 내밀었더니 아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예의바르기도 해라. 아기는 커피를 받아 나가면서 다시 나에게 와서 “감사합니다.” 또 인사를 하고 나갔다. 우리나라의 미래가 참 밝구만. 

이제 슬슬 정리하고 다시 걸으러 나가 볼까 싶었는데 점원이 구운 과자를 들고 찾아왔다. 

“아까는 정말 감사했어요. 이거 저희 가게에서 만든 황남빵인데 커피랑 같이 드세요.”

아마 이 분도 위그든씨의 사탕가게를 읽고 자란 어른이 분명하다.

오늘 이야기의 결말은 정말 동화 같다. 과자를 먹는 도중 아까 그 아기가 아까와 같은 속도로 막 뛰어 들어왔다. 

“이거 엄마가 가져다 드리래요. 감사합니다.”

테이블 위에는 300원이 놓여 있었다. 

이변이 없는 한 저 아이는 다정한 어른이 될 텐데, 거기에 300원 어치 다정함을 얹은 것 같아서 기뻤다. 그나저나 요즘 교과서에도 위그든씨의 사탕가게가 실려 있으려나?

       

산마쥬스와 베이스 캠프/2021.08.25 

북한산 입구에 있는 ‘베이스 캠프’라는 가게에서 ‘산마쥬스’를 사 먹었다. 보통은 편의점에서 보리차나 옥수수차를 사 마신다. 사실 마로 만든 주스가 어떤 맛인지 잘 몰랐다. ‘산마쥬스’라는 단어가 귀여워서 눈이 갔다. 표기법에 따르면 ‘주스’라고 써야 맞지만 ‘쥬스’인 편이 더 귀엽구나. 옳은 것보단 귀여운 것이 낫지. 그렇고말고. 


여기선 김밥도 팔고 커피도 팔고 맥주도 팔고 식물도 판다. 주문을 하고 나서 보니 사장님이 바빠 보여서 “저녁에 음료를 시켜서 죄송해요. 바쁘시면 다음에 다시 올까요?”했더니, “아니야! 조금만 기다려줘요. 내가 대신 완전 찐하게 만들어 줄게. 여기 자주 오는 아가씨잖아. 김밥이랑 이것저것 사가고.”하셨다. 아닌데…. 오늘 처음 왔지만 그냥 그런 척 했다. 앞으로 자주 오지 뭐. 

‘산마쥬스’를 기다리며 가게 앞에서 파는 식물들을 구경했다. 식물의 이름을 사장님 마음대로 써 두셔서 귀여웠다. 제라늄엔 ‘제나륨’이라는 새 이름이 붙어 있었고, 산세베리아는 ‘산세베리’, 스킨답서스는 ‘스킨’이라고 자유롭게 줄여 쓰셨다. 우리 엄마도 다래끼를 ‘다라끼’라고 쓰는데. 나는 중년 여성들의 편견 없는 오타에 유독 약하다. 너무 귀여워.  

15분 정도 기다리니 사장님이 드디어 믹서기에 마를 넣고 갈기 시작하셨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직접 만든 식혜도 한 잔 주셨다. 

“미안해서 마 반 통을 다 넣어버렸어. 완전 진할 거야. 근데 이거 어른들이 마시는 건데. 누구 주려고. 엄마? 아빠?”

얼마나 어른이어야 마실 자격이 되는 거냐고 장난을 치려다가 그냥 “아뇨. 제가 마시려고요….”하고 말았다. 처음 먹어 본 ‘산마쥬스’는 그동안 내가 이걸 왜 안 마셨나싶을 정도로 아주 부드럽고 맛있었다. 검색해보니 마가 술 마시는 사람에게 좋단다. 비가 그쳐야 다시 사 먹으러 올 텐데. 내일부턴 또 비가 올 예정이다.      



지난여름에 쓴 산책 일기 중에 특별히 마음에 드는 것으로 두 편 골라 보았다. 여러모로 귀여운 일이 많았던 여름이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산책만 해도 살겠다. 매일 산책만 할 수 있다면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브런치를 통해 꾸준히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요. 각자 글을 읽는 데 약간의 시차가 있다보니 남겨주시는 댓글이나 하트에 제때 응하지 못하고 놓쳐버리곤 합니다. 화려한 콘텐츠가 이렇게나 많은 시대에 심심한 글로 연결될 수 있다는게 문득 벅차서 짧은 쪽지를 남깁니다. 글을 써서 부도 명예도 얻지 못했지만 저와 같은 결을 가진 친구들을 만들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독자 분들을 만나는 황홀함에 대해서 강화길 소설가님이 남긴 멋진 말이 있어 빌려 씁니다. 


“언젠가 작가가 되면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날 것이고, 그러면 더는 외롭지 않게 되리라 믿었다.”

- [글리프] 4호 강화길 편, 작가 소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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