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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24. 2022

택시와 기념품

좋은 대화를 나눈 뒤엔 일기장을 펼친다. 순간을 기념품으로 만드는 일이다

기념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 여행지에 가면 소품샵에서 뭐라도 사는 타입의 인간. 일 년에 서너 번 이상은 놀러 가는 제주도에서도 매번 기념품을 사온다. 엽서, 향초, 술잔. 마땅한 곳이 없을 땐 조개껍데기나 솔방울이라도 주워온다. 딱히 쓸데는 없지만 작고 아름다운 것들이 좋다. 집안 곳곳에 순간의 흔적들이 조그맣게 남아 있다. 사실 일기를 쓰고 사진을 찍는 것도 일종의 ‘기념품 수집’이라 할 수 있겠다. 어쨌거나 행복의 순간이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남는 것이 좋다.


좋은 대화를 나눈 뒤엔 대체로 일기장을 펼친다. 그 순간을 기념품으로 남겨두고 싶기 때문이다. 택시는 좋은 대화가 종종 발생하는 의외의 장소다. 다시 볼 일 없을 사람(아마도), 친절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 사람(이제껏 만난 기사님들은 대체로 내게 윽박을 질렀으므로)이 상대였기 때문에 더 특별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기대하고 받는 생일 선물보다 특별하지 않은 날에 받는 깜짝 선물이 더 기쁜 것처럼.


내가 택시를 타는 상황은 크게 세 가지다. 술을 마셨거나. 많이 지쳤거나. 아니면 낯선 곳에 혼자 찾아가야 하거나. 마지막 상황은 주로 여행 중에 생긴다.      



제주도 중산간에 있는 카페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을 때의 일이다.

제주도를 가로가 긴 타원형이라고 가정한다면, 원의 중심엔 한라산이 있고, 중심으로 가까이 갈수록 교통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중산간 마을에 갈 때는 대체로 택시를 탄다.

그날 D와 나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주도 너무 좋다. 돈만 많으면 여기 집 사고 싶다. 우니야 나 제주도에 집 사면 언제든지 와.”

D가 말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기사님이 슬며시 대화에 참여했다.

“내가 제주도에 집 만드는 방법 알려줘요? 마음에 드는 동네를 하나 정해. 거기에 민박집 하나는 있을 거 아니요. 그리고 제주도 올 때마다 그 민박집에서 묵는 거지. 1년, 2년 그렇게 같은 민박집에서 자면 그게 집이지 뭐. 그러다 민박집 아저씨 아줌마랑 친해지면 회도 얻어먹고 고기도 얻어먹고. 귀찮게 집을 뭐 하러 사. 그 돈으로 술을 사 마시지.”

이 아저씨 말씀 참 잘하시네. 묘하게 설득 돼.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리 셋은 친구가 되어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잠시 후 내비게이션이 도착을 알렸고, 우리가 짐을 챙기는 사이 기사님은 콘솔박스에서 부스럭 부스럭 무언가를 꺼내 우리에게 건냈다. 붕어빵이었다.

“오는 동안 차에서 맛있는 냄새가 좀 났을거요. 이거 내가 이따 먹으려고 사둔 건데. 나눠 먹읍시다. 즐겁게 놀다들 가쇼.”

역시 생선은 제주산인가? 아주 따뜻하고 달콤하고 바삭한 붕어빵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 종일 걷고 기진맥진해져 숙소로 돌아가는 택시를 탔는데 마침 창밖으로 굉장한 노을이 쏟아지고 있었다. 피곤에 취한 나는 작게 말했다(취하면 아무한테나 말을 잘 붙이는 편이다).

“오늘 노을이 정말 엄청나네요.”

기사님은 창문을 내리며 답했다.  

“그쵸? 요새 이런 날이 흔치 않은데. 오랜만이네요.”

문득 이대로 숙소에 들어가긴 좀 아까워졌다. 노을의 변화를 감각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분명 해질 때 가기 좋은 비밀 장소를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 슬쩍 물었다.

“혹시 평소에 노을은 어디서 보세요. 이 근처에 좋은 데가 있나요?”

역시나 그에겐 비밀 장소가 있었다. 기사님은 차를 돌려 해가 지는 해안도로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여기 내려서 오름이 보이는 방향으로 쭉 걸으세요. 노을빛이 바다에 떨어지는 게 반짝 반짝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그 추상적인 말만 믿고 하염없이 걸은 대가로 오래 기억에 남을 멋진 노을을 봤다.      


전에 사귀던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시청각 자료로 영화 ‘테이큰’을 보여주었다. 니암니슨이 출연한 그 영화 맞다. 파리로 여행을 떠난 딸이 친절에 속아 낯선 사람과 함께 택시를 탔다가 납치 당하는 내용. 그는 정지 버튼을 누른 뒤 나를 타일렀다. 세상이 이렇게 무섭단다 아가야.

그의 말이 맞다. 늘 경계해야 한다. 위기는 언제나 방심한 이의 뒤통수를 노리니까. 문제는 내가 경계심이 풀린 순간 선물처럼 등장하는 반짝임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데 있다.     



해피 뉴 이어입니다. 여러분. 겨울엔 눈 구경 여름에는 바다 구경. 계절 잘 챙기는 한 해가 되시기를 응원할게요. 올해는 귀여운 기념품 같은 이야기를 자주 써 보려고 해요. 가볍지만 다정한 스몰토크를 통해 인류애를 회복하는 것이 작은 목표입니다. 자주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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