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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Dec 03. 2023

우리 ‘안 해본 짓’을 하자

낯선 세계에 들어가면 낯선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 맞다. 우리 숙제 정하고 헤어져야 하는데!”

K와 나의 만남엔 귀여운 규칙이 있다. 우리는 헤어지기 직전에 두 가지를 정한다. 하나는 다음 약속 날짜이고, 나머지 하나는 만나는 날까지 해올 ‘숙제’다.      


-누가 나이를 물었을 때 “몇 살처럼 보여요?”라고 되묻지 않기

-3개월 안에 퇴사할 거 아니면 “퇴사해야지”라고 말하지 않기      


위의 예시처럼 주로 나만의 사소한 챌린지일 때가 많다. 2023년 신년 모임에서 나는 ‘안 해본 짓 하기’라는 숙제를 냈고, 그 사이 러닝 크루에 들어갔으므로 다소 의기양양하게 숙제 검사에 임했다. 서른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운동 한 번 안 해본 내가 러닝 크루에 들어간 건…. 확실히 ‘안 해본 짓’임이 분명 했다.


“근데 거기 사람들 진짜 신기하다? 나이키 광고 세계관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긍정적이랄까. 꼬장꼬장하고 시니컬한 업계 관계자들만 만나다가. 건강한 기운 뿜뿜하는 사람들 만나니까 어리둥절해.”   

“하핳 나이키 광고 세계관. 어떤 느낌이지 딱 알겠다.”

“그동안 우리가 만나왔던 사람들이랑은 확실히 뭔가 달라. 오늘도 강풍주의보 떴길래 달리기 못하겠다 싶었는데 모임이 개설됐더라고. ‘강풍런 뛰실 분’ 골 때리지 않아? 야밤에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광기런’도 매일 열려. 무서워...”

“아 너무 웃기다. 실제로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더 신기한데?”

“강풍런 참석자 그새 세 명으로 늘었네. 근데 미치광이들 사이에 있으니까 나도 좀 강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토요일 아침에 비까지 내리는데 5km를 뛰었다? 다들 뛰니까 따라 뛰게 되더라고. 심지어 좀 신나기까지 했어.”

“이참에 언니도 미치광이가 되어 버려요! 할 수 있따!”

“너도 한번 해보면 어때?”     


낯선 세계에 들어가면 낯선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게 재밌어서 언제부턴가 의식적으로 ‘안 하던 짓’들을 지향하고 있다.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경험을 저축한다’는 취지에서 일단 시도라도 해보는 편이다. 사소하게는 평소에는 입에도 안 대던 식재료를 먹어 본다던가(최근엔 ‘돼지 꼬리’였다. 한입 먹고서 ‘한 번 먹어봤으면 됐다’싶었음), 룰도 모르는 스포츠 경기를 관람한다던가(한국시리즈 결승전을 보았고 이래서 사람들이 야구에 열광하는구나 조금은 알게 되었다).


눈 딱 감고 해버리면 그만인 일들이 있는가 하면, 시도하는데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도 물론 있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면 질색인 K에게 러닝 크루에 가입하는 일이란 말 그대로 도전이었을 것이다.      


“취미에 목숨 거는 사람들을 이제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사람들한테는 그 세계의 생활이 또 다른 자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가 맨날 똑같은 사람들을 똑같은 상황에서만 만나잖아. 그러다 보니 그 환경 안에서 별로라는 평가를 받으면 무너지게 되는 거고. 근데 자아가 하나 더 있으면. 잠깐 거기로 도망갈 수 있는 거지. 회사원 자아는 기획안도 까이고 회의도 망하고 여러모로 아주 수치스러웠지만. 달리기 자아는 5km 쉬지 않고 달리기에 성공했으니까. 합산을 해보면 나라는 사람이 그렇게 형편없진 않다는 결론이 나오더라고.”  

“…ㄱ그렇다면 혼자 달려도 되잖아요?”

“인간은 인정을 먹고 사는 동물인가봐. 혼자 성취를 이루는 거랑 누가 내가 이룬 성취를 봐주는 거랑은 또 다르더라. 자아라는 개념이 애초에 ‘세계와 구별되는 나’를 말하는 거니까. 구별될 세계가 없으면 애초에 다른 ‘자아’라는 게 성립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알겠어요. 일종의 비빌 언덕이 하나 더 생긴다는 거죠? 설득 완료! 일단 나가는 볼게요.”

“눈 딱 감고 싫더라도 열 번만 나가 보십셔. 열 번 채워 오시면 ‘참 잘했어요’ 도장 찍어드릴게요.”      


며칠 전 첫눈이 내리던 날 K를 만났다. 강남역에서 근무하는 K가 우리 회사 근처로 오기로 했다. 경의선 숲길을 함께 뛰고 저녁을 먹는 일정이었다.      


“눈이 이렇게 오는데 우리 오늘 뛰는 게 맞아?”

“일단 한번 상황을 보죠. 저 오늘 스포츠 브라 입고 러닝화 신고 출근했어요.”

“사실 나도 크크. 강풍런 친구들이 그러는데 눈 오는 날 뛰면 안 추워서 오히려 좋대.”

“우리가 영하 3도에 퇴근하고 뛰는 사람이 될 줄이야.”

“그러게.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러닝 크루 10번 나가는 게 목표였던 K는 어느새 모임의 프로참석러가 되었다고 한다. 올가을엔 우리 둘 다 10km 마라톤을 두 번이나 완주했다. 우리는 겨울 달리기 복장에 대해 이야기하며 쌀국수와 볶음밥을 먹었다. 겨울엔 추우니 뛰지 않겠다는 선택지는 없다. ‘안 해본 짓’을 계기로 강해진 우리, 상상해 본 적 없는 우리가 마음에 든다. 다음에 만났을 땐 한강에서 신년 달리기를 하기로 했다.


2024년엔 또 어떤 안 해본 짓을 해볼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오늘의 스몰 토크 주제

가장 최근에 한 ‘안 하던 짓’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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