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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Nov 27. 2023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

"나 되게 귀여운 에피소드 있었어!"

최근에 열심히 모으는 스몰토크는 ‘일상 속 귀여운 에피소드’다. 사는 게 힘든 것만 같지만 가만 보면 피식 웃음을 짓게 하는 귀여운 상황들이 수시로 발생한다. 누군가 “요즘 어떻게 지내? 재밌는 일 없어?”라고 물었을 때 무의미한 신세한탄을 하는 대신 “나, 되게 귀여운 에피소드 있어”라고 산뜻하게 답하는 게 목표다. 


그래서 귀여운 이야기를 들으면 후다닥 메모 앱을 켜고 기록해둔다. 원래 나이가 들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아는 순으로 인기가 있지 않나? 이야기꾼 할머니 처럼! 나는 오래 전부터 꾸준히 노인대학 인기짱을 노려왔다.


귀여운 에피소드 1

회사 선배한테 들었는데 애기들은 엄마 아빠 말버릇을 그대로 따라 한다고 하더라? 지난번엔 배달을 시켰는데 라이더 분이 초인종을 누르니까 애기가 현관으로 막 뛰어가서 소리를 지르더래. “놓고 가주세요~!” 너무 귀엽지 않아?


귀여운 에피소드 2

우리 동네에 꼬치구이 파는 위스키 바가 생겨서 갔다 왔거든? 근데 보통 위스키 바에서 꼬치구이를 팔진 않잖아. 꼬치 굽는 게 워낙 손이 많이 가니까. 그래서 사장님한테 어쩌다 위스키랑 꼬치구이를 같이 팔게 됐냐고 물어봤는데, 그 계기가 엄청 귀여웠어.

사실 사장님이 이 근처에서 대학을 나왔는데. 축제 때 닭꼬치 굽기 담당이 됐대. 태어나서 처음 꼬치를 구웠는데 ‘나 재능이 있나?’ 싶을 정도로 잘하더래. 남들 한 개 구울 때 다섯 개씩 동시에 굽고 그랬나봐. 축제 놀러온 동네 주민 한 분은 이런 칭찬도 했대. “내가 꼬치를 너무 좋아해서 이 동네 꼬치집에 다 가봤는데. 총각이 구운 꼬치가 제일 맛있다. 나중에 꼬치집 차려요. 내가 먹으러 갈게.”

주민 분은 그냥 기분이 좋아서 한 칭찬일 수도 있겠지만, 그 칭찬이 이상하게 계속 생각이 났다나 봐. 그래서 진짜 로 꼬치집을 차리게 됐다고. 좀 무모하지 않냐고 웃으시는데, 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신기한 얘길 하나 더 들었는데, 장사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어떤 손님 한 분이 사장님을 계속 빤히 보더래. 속으로 ‘왜 그러시지?’ 생각했는데 나중에 계산할 때 “우리 알지 않아요?”라고 했다는 거야. 알고 보니 그때 축제 때 꼬치집 차리라고 칭찬해줬던 주민 분이었던 거야. 그분이 진짜로 꼬치구이 마니아였던 거야. 동네에 꼬치집이 생겼다고 해서 와봤던 거고. 둘 다 이렇게 다시 만난 게 너무 신기해서 한참 얘기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이 이야기의 교훈은? 칭찬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귀여운 에피소드 3

밤 산책을 마치고 아파트 단지로 돌아오면 저녁 아홉 시쯤 되거든? CU 편의점에 물건이 들어오는 시간이야. 언제부턴가 매일 밤 아홉 시 전후로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애들이 단지 내 편의점 앞을 기웃거리는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까이 가 봤는데 '포켓몬 빵'을 기다리는 거래.

"포켓몬 빵 때문에 매일 여기 와서 기다리는 거야?"

"네. 하루에 두 개씩 들어와요. 주말에는 하나!"

"그럼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딱 두 명만 빵을 가질 수 있는 거네?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나한테 알려줘도 돼? 경쟁자인데?"

장난을 좀 쳤더니 신나서 설명해주던 친구가 '헐 맞네?' 하는 표정으로 경계하며 등을 돌리더라고. 대기 중인 사람만 못 해도 여섯 명은 넘어 보이는데. 어떤 기준으로 빵을 나눠 가지지? 가위 바위 보를 하나. 아님 선착순? 궁금했는데 섬세하지 못한 장난을 치는 바람에 추가 질문 기회를 잃었지. 어쨌거나 제법 평화롭게 빵을 나눠 가지는 건 분명해. 아무도 울지 않고 조용히 흩어지는 걸 보면.


귀여운 에피소드 4

오늘따라 발목이 아파서 산책 도중 동네 빵집 들러 잠깐 쉬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동그란 안경을 쓴 아기가 막 뛰어 들어왔다. 

“저기, 주문 할 게요! 아이스 라떼인데 얼음을 많이 넣어 주세요! 엄마 꺼예요!”

아직 어려 보이는데. 벌써 심부름을 하네. 너무 똑똑하고 귀엽다. 속으로 생각하는 찰나에 아기가 곤경에 처했다. 

“근데 어쩌지. 300원이 부족한데.”

나는 잠시 고민했다. 도와줘도 될까? 마침 주머니에 어제 음료수 뽑아 먹고 남은 300원이 있긴 하다. 오지랖은 아닐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급격히 시무룩해진 아기가 빵집 밖으로 나가려고 해서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를 읽고 자란 어른은 곤경에 처한 어린이를 모른 척 하지 않아! (이 책에 실린 단편 ‘이해의 선물’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4살짜리 어린 아이가 돈 대신 ‘버찌씨’를 내자, 아이의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었던 사탕가게 주인은 “돈이 남는다”며 거스름돈으로 2센트를 돌려준다)  

“저기…! 제가 마침 300원이 있어서요.”  

카운터로 쭈뼛쭈뼛 걸어가서 300원을 내밀었더니 아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예의바르기도 해라. 아기는 커피를 받아 나가면서 다시 나에게 와서 “감사합니다.” 또 인사를 하고 나갔다. 우리나라의 미래가 참 밝구만. 

이제 슬슬 정리하고 다시 걸으러 나가 볼까 싶었는데 점원이 구운 과자를 들고 찾아왔다. 

“아까는 정말 감사했어요. 이거 저희 가게에서 만든 황남빵인데 커피랑 같이 드세요.”

아마 이 분도 위그든씨의 사탕가게를 읽고 자란 어른이 분명하다.

오늘 이야기의 결말은 정말 동화 같다. 과자를 먹는 도중 아까 그 아기가 아까와 같은 속도로 막 뛰어 들어왔다. 

“이거 엄마가 가져다 드리래요. 감사합니다.”

테이블 위에는 300원이 놓여 있었다. 

이변이 없는 한 저 아이는 다정한 어른이 될 텐데, 거기에 300원 어치 다정함을 얹은 것 같아서 기뻤다. 그나저나 요즘 교과서에도 위그든씨의 사탕가게가 실려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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