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선생님, 이게 2.4cc 맞다고 생각해요?”
“선생님, 제가 하는 말 듣고 있어요?”
“선생님!”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재수 없게 계속 병원 꿈꾸네.
퇴사해도 아직도 병원에 있는 기분이었다.
밤에 잘 때마다
내 귀에는 중환자실 알람 소리가 들렸다.
신생아중환자실에서 몇 개월밖에 일하지 않아서
빨리 잊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퇴사 후
본가 침대 위에 누웠을 때 많은 감정들이 지나갔다.
시원섭섭함, 불안감, 긴장감.
패배자가 된 기분도 들었다.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을 걷다가 내가 못 견뎌 탈선하는 기분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이
“야 너 어디가? 계속 여기 걸어야지! 넌 끈기가 없네.”라고 말하며 내 자존심을 긁고 있는 느낌.
(저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그저 혼자서 찔리고 남이 날 그렇게 보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에서 파생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자취방에서 다짐했던 것을 다시 상기시키며 다독였다.
첫 번째 병원은 12월에 입사하였다.
입사하기 전, 나는 사실 수도권 대학병원 입사 지원을 하였고 운 좋게 합격하였다
수도권 대학병원 입사일도 12월이라,
이전까지는 첫 번째 병원에서 경험을 쌓기 위해 다녔다.
하지만 경험 쌓기도 전에 퇴사했다.
퇴사 전후로 몇몇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음 병원이 훨씬 중증도가 높고, 힘든 병원일 텐데. 지금 짧게 근무하고 퇴사하면 다음 병원은 어떡해.”
맞는 말이었다.
첫 번째 병원은 두 번째 병원 중증도 발끝도 못 미칠 텐데 여기서 퇴사한다?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때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두 번째 병원에 더 오래 일하고 싶은데, 여기서 힘을 다 뺄 필요가 있을까?”
“팩트로, 첫 번째 병원에서 빨리 퇴사하면 두 번째 병원도 당연히 오래 못 버티고 나오겠지.라고 주변 사람들은 생각하겠지. 난 그런 취급당하기 싫은데. 자존심 상해”
특히
프리셉터(사수)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더 불타올랐다.
여느 때와 같이 불타오르고 있는 도중,
문뜩 한 생각이 치고 올라갔다.
“두 번째 병원에서 1년 이상 일하면 되는 거잖아. 내 인생인데. 내가 선택하는 거지.”
두 번째 병원에서 1년 일하자. 그러므로 난 퇴사한다.
무척이나 주변 사람들이 신경 쓰이지만 다 꺼버리고
내가 선택한 첫 포기였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남들 시선을 보지 않는.
오히려 첫 포기가 나에게 좋은 거름이 되었다.
나답게 살 수 있는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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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이후의 내 삶은, 잠시나마 공주님 일상이었다.
본가 집이 근교로 이사 가게 되었고,
거기에는 내 십년지기 친구가 살고 있었다.
그 친구는 초등교사 임용고시가 끝나고 초등학교 발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 역시 두 번째 병원 발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시기가 맞아, 그 친구와 자주 만났다.
친구와 함께 카페에서 같이 책 읽거나 나는 글을 썼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야 우리 필라테스하러 갈 시간임.”
같이 필라테스도 하러 갔다.
아무런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교양만 쌓고 있는 삶.
이것이 공주님 일상이 아닐까?
(공주라면 스트레스받으면서 공부도 하겠지만…ㅎ)
친구가 그 당시 연락하던 남자분이,
“카페에서 책 읽고 글도 쓰고 되게 교양 있고 기품 있으시네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아니 그렇게 착각 심하게 해서 사실대로 말 못 했다니까.”
“맞잖아. 카페에서 너 책 읽고 나 글도 쓰잖아.”
“... 난 거기서 로판(로맨스판타지) 읽고 너는 로맨스 소설 쓰고 있다는 거 말 못 한다고.”
“....”
행복한 일상이었다. ^^
근교 집이 마치 별장 같았고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지내었다.
기력이 어느 정도 모이는 동안 돈이 떨어져
잠깐 요양병원에서 근무하였다.
거기서 나는 귀염둥이 신생아였다.
왜냐면, 함께 일했던 선생님들이 나이가 많으셨기 때문이었다.
보통 60대셨고, 어제 막 은퇴했다는 선생님은 70대셨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들도 70대, 제일 나이 많은 선생님은 90대셨다.
라운딩 도시는 것도 힘들어 보이셨지만,
허허 웃으시며 “허 선생~”이라고 날 부르셨던 정 많던 얼굴은 아직도 생각이 난다.
내가 보는 환자는 40명 정도 되었고
그중 간호사 말을 듣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일과가 그 할아버지와 싸우는 게 나의 루틴이었다.
욕창 예방을 위해 자세를 좌우 옆으로 눕혀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죽어도 똑바로 눕고 싶다고 떼를 쓰셨다.
심지어 할아버지는 bed ridden(침상 밖으로 못 나가는) 환자였다.
“할아버지, 계속 똑바로 누우면 욕창 생겨요.”
“욕창 생겨도 괜찮다. 잘만 먹고 산다.”
“우리가 억지로라도 자세 변경해서 욕창 없으시니까 그런 말씀하시지, 생기면 그런 말씀도 못 해요. 진짜 죽는다고요.”
“내 나이가 90대다. 그냥 내 마음대로 하고 죽으면 안 되나?”
…. 할 말이 없었다.
그냥 하고 싶은 거 하시는 게 제일 좋지만, 욕창 예방이… 내 일인걸…
매번 이 할아버지와 얘기할 때마다 딜레마였다.
“안 돼요. 여기 병원에서 죽으면 안 돼요. 할아버지 때문에 저 힘들어요.”
“그러면 나랑 같이 죽자.”
“아니 할아버지! 말씀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저 20대라고요. 할아버지 90대고 하실 거 다 하셨으면서! 저 아직 못해본 것도 많은데 말씀이 너무 심해요!”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할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가만히 계셨다가
이내 말 한마디를 뱉었다.
“... 이렇게 누우면 되나?”
라고 옆으로 누우며 말씀하셨다. 미안했나 보다.
나는 고개만 끄덕거리며 할아버지 방에서 나왔다.
그 뒤로 할아버지가 정말 내 말대로 하는지,
가끔 방에 가서 체크하고 가끔 잔소리도 했다.
그 할아버지 말고도,
병원에서 귀여운 할머니,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가끔 싸우기도 했고, 정도 들기도 했다.
어떤 할머니는 매일 곡소리를 내셨는데
알고 보니 옛날에 무당이셨다고 했다.
신기한 마음으로 찾아가서,
“할머니 할머니 점 보실 수 있으셔요?”
“옛날이나 했지.”
“할머니 저 언제 결혼해요?”
나는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
“몇 살인데?”
“저 27살이에요.”
“결혼할 때 됐네!”
“진짜요?”
“나도 그때 했거든”
라며 해맑게 웃으시던 할머니도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나는 힘들었던 병원 기억을,
좋은 추억으로 덮으며 일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