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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연 Mar 26. 2019

버려지는 것들에 대하여

1. 영수증

6개월간 타국에서 혼자 살아남기 위해, 나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포기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외출이었다. 외출은 곧 돈이다. 집밖으로 나가는 순간, 포장마차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붕어빵 냄새를 맡게 되고, 딱 예상가능한 커피맛을 즐길 수 있는 스타벅스가 눈에 띄고, 올리브영에 들어가서 거의 다 써가는 스팟패치를 사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종강한 뒤 출국까지 남은 약 두 달가량의 시간동안, 새로운 알바를 구하기도 애매해진 나는 지독한 칩거생활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외출을 하지 않자, 내 삶은 급격히 건조해졌다. 이미 봤던 영화를 또 보는 것, 봄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 책을 읽는 것처럼 집안에서 느낄 수 있는 자극들은 시간이 갈수록 그 강도가 무뎌졌다. 읽지 않은 책이 널렸는데도 전혀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나는 하루하루 시간을 죽이며 출국만을 기다렸다. 


독일에서 한달 째 살고 있는 지금, 돈 쓸 일이라는 것은 박테리아처럼 자가증식하며, 아이들의 상상력처럼 무궁무진함을 느낀다. 고작 반년 살거면서 책장 한 켠에 캡슐머신기를 장만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간식을 눈앞에 둔 봄이가 '먹어'라는 말을 듣고 달려드는 것처럼 지금의 내 소비행위는 격정적이고 흥분에 차있다. 나는 혼자 살아가며 내 주변을 소비로 채워가는 일상에 행복을 느끼는 중이다. (소비행위라고 해서 꼭 사치를 일컫는 게 아님을 일러두고 싶다. 요즘 내 일상 최고의 행복은 '마트에서 시리얼 사기'이다. 지난 주에는 '마트에서 요거트 사기'였다.) 


소비가 나쁜 것은 아니니, 일상을 기억하기 위해 버려지는 영수증을 모으기 시작했다. 가계부를 쓰고 하나둘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은 벌써 전공책 한 권의 두께가 되어있다. 그날 하루동안 주머니에 꼬깃꼬깃 쑤셔넣은 영수증을 펼쳐보며 그날의 일을 되돌아볼 수 있으니, 나의 영수증들은 그 고유의 기능을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오늘의 버려질 뻔한 영수증

오늘의 영수증에는 토마토와 토르텔리니, 다먹은 뮤즐리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먹던 토마토 말고 다른 품종의 것을 샀는데 훨씬 알이 크고 맛있었다. 지금보니 가격도 더 싸다. 독일어로 토마토는 tomaten이구나. 그저께 산 토르텔리니가 맛있어서 볼로녜제 맛도 사봤다. rewe에서 파는 시금치&모짜렐라맛이 더 맛있다.

그저 버려졌을 영수증에게 '기록물'이라는 의무를 주고 '기념품'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니, 이토록 쓸모 있을 수 없다. 한달동안 모은 영수증이 전공책 한권만하니, 5개월 뒤에 나는 아마 전공책 6권만큼의 영수증을 들고 귀국하겠지. 영수증의 종이가 가벼운 재질이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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