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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May 04. 2020

짜장과 무릎

 "오늘 정말 메롱이다." 이 말을 나는 주로 과음한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릴 때 쓴다. 평생 익숙하게 사용해 온 '메롱'의 유래를 종잡을 수 없는 것도 신기하지만 상대를 놀릴 때 혀를 살짝 내밀며 내는 이 소리가 부정적인 어떤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 변형된 것은 더 신기한 일이다. '메롱이다', '메롱스럽다'의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 힘들다, 우울하다, 난처하다, 뻘쭘하다... 비슷한 말은 나열할 수 있지만 메롱이 아닌 다른 말로는 정확하게 정의 내리지 못하겠다. 정의 내리기 힘든 어떤 부정적인 상태를 적절하게 표현해주는 말임은 확실한 것 같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는 사랑하는 상대에게 너를 마시멜로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랑한다는 말이 부족할 때가 있다. 글의 화자인 '나'는 이 말이 '마음 상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 같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상대는 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는 '자기가 평생 들어본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한다.


 2년 전 여름에 만난 애를 오랫동안 좋아해 왔다. 그 애와는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만났지만,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런 그 애와 딱 한 번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까지 먹는 데이트다운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그 하루를 이유 삼아 나는 그 애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애써 오해했다. 그런 나를 두고 동생이 따끔하게 말했다.


 "걔는 그냥 조금 여유 있을 때 언니가 짜장면처럼 생각나는 거야."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 말에 그 애의 마음이 정확하게 이해가 되어서 슬펐다. 맛있지만 매일 생각나지는 않는 짜장면, 가끔 생각나는 짜장면, 이삿날 신문지를 펼쳐놓고 시켜 먹는 짜장면. 떡볶이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짜장면 없이는 살 수 있다. 짜장면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끔만 생각나는 것도 사실이다.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사실이다. 그러니 나를 향한 그 애의 마음은 '짜장 한' 것이었을까? 나는 너를 마시멜로 해가 아니라 나는 너를 짜장 해라니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나고 서글퍼졌다.


 우리는 그날 꽤 사랑스럽고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았다. 사고로 다리를 다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그 애가 나에게 고백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였다. 나는 그 애가 다리를 다쳤다는 사실보다 그 사실을 나에게 알려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고, 조금은 더 넓은 자리를 가진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예매했다. 그런데도 두 시간여의 러닝타임을 견디기를 힘들어하던 몸짓을 기억한다. 짜장한 정도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이제 알아채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날의 그 애를 생각하면 아직 그 마음을 조금은 오해하고 싶어진다. 여름이 끝나가던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영화를 보고 일본 라멘을 좋아하는 그 애와 함께 탄탄멘을 저녁으로 먹었고 야외에 있는 벤치에 앉아 맛이 없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인공적인 맛이 강하게 나는 딸기 맛 아이스크림이었다.


 "무릎이 뜨거워."


 그 애와 영화를 보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적당한 온도의 바람이 부는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이 좋아서 그 애가 그날 하루 평소보다 무리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좁은 영화관 좌석에서 장시간을 버틴 그 애의 다친 무릎이 빨갛고 뜨거웠다. 놀람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괜찮냐고 물으며 무릎 위에 내 손을 올렸다. 무릎에서 피어오르는 열감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때 나는 그 애랑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자꾸 넘어져서 아파도 괜찮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를 향한 그 애의 감정이 짜장 한 것이었다면 그 애를 향한 나의 감정은 무릎 한 것이었을까. 자주 무릎으로 웅크리고 앉아 무릎이 없어질 것 같다고 생각한다. 무릎은 연약하고 자주 달그락하는 소리가 난다. 그래서 무릎이라고 말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짜장과 무릎은 너무 다른 마음이라서 나는 그 애를 좋아하기를 그만두었다. 그 애의 무릎은 아직 뜨거울까. 이제는 좁은 영화관 좌석에서 아주 긴 영화도 무리 없이 볼 수 있을까. 그만두었다고 말을 해야 그만두어지니까 계속 그렇게 말하지만, 아직 좋은 것을 보면 그 애가 떠오르고 그 애를 떠올리면 마음이 무릎 해진다.


 야 진짜 너 너무 나쁘다 짜장면이라니.

 이제는 운전하다가 좋은 거 보면서 너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하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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