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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May 11. 2020

동굴 옆의 직장

 동생이 작은 가게를 접고 최근에 취직한 직장은 동굴 옆에 있다. 프리랜서로 외주 작업을 맡은 적은 있지만 직장 생활은 처음이다. 동생은 결코 직장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왔기에 나는 아직도 동생이 직장인이라는 사실이 어색하다. 동생은 밤 열두 시 전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 일곱 시쯤에 눈을 뜨는 삶을 학창 시절 이후 살아본 적이 없다. 동생이 집을 마련하지 못한 1주일여의 시간 동안 좁은 원룸에서 동생과 함께 지냈는데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냐며 고통스러워하는 동생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 고통에는 영영 익숙해질 수 없다고 놀려주는 재미는 덤이었다. 지각도 하지 않고 벌써 직장인 2주 차에 접어든 동생을 보며 새삼 대견하다고 느낀다. 작은 회사이지만 프레젠테이션도 한 번 했고 야근도 한 번 했고 평일인데도 퇴근을 축하하며 소맥을 마시기도 했으니 직장인으로서 겪을 그럴싸한 일을 웬만큼은 해 본 셈이다.


 지난주에 연휴를 맞이하며 퇴근 시간에 맞추어 동생을 데리러 갔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종로의 맥줏집에 가기로 했다. 연휴를 앞둔 마음만큼이나 날씨도 연한 초록색과 함께 들떠 있었다. 동굴 옆에 있는 곳답게 나는 굽이진 길을 오르고 올라 편의시설 같은 삶의 속성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이런 곳에 직장이 있다는 사실은 정말 근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막 연두색으로 무성해진 산자락을 내려다보았다. 동생은 구겨진 얼굴로 차를 타자마자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울분을 쏟아냈다. 직장이라는 곳에서는 억울하고 우스운 일이 매일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법이니까.


 동생은 삶의 한 시기를 보내고 동굴 옆의 직장에서 직장인으로서의 새 시기를 맞이했다. 시작과 끝은 맞닿아있지만 이렇게 정확히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한 시기의 끝을 맞이할 때면 설렘보다는 쓸쓸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한 시기를 보내고 다음 시기에 접어들며 불확실한 감정 속에서 삶의 명제를 쌓는다. 동생은 어떤 명제를 가지고 취직 준비를 결심했을까. '결국에는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것이 제일 편하더라.' 같은 멋없는 판단. 고집스러운 성인이 되고 싶지 않지만, 경험 안에서 단단해진 명제 앞에서는 어른의 아집이 생겨버리고는 만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일은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지만 무시하는 것은 더 힘든 일이다.


 모르는 상대에게 운전대를 맡기는 일 역시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일 때가 많다. 대리운전을 맡기고 나면 좌석의 높낮이나 백미러의 위치가 바뀔 때가 많아서 다시 나에게 맞게 원상 복귀시키려면 꽤 번거로운 작업을 거쳐야만 한다. 그런 것은 사람의 키나 몸집이 달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될 때도 있다. 바로 전조등 설정이 자동에서 수동으로 바뀌어 있을 때이다. 이것은 아빠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다. 주위의 밝기에 따라 자동으로 불이 켜지고 꺼지도록 설정된 것을 굳이 수동으로 바꾸어 꺼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일을 자주 겪다 보니 이제 대리운전을 맡긴 후에는 전조등 설정을 꼭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지만 한 번은 어두운 밤길을 전조등을 꺼 놓은 채 달리다가 빵빵하는 경적에 화들짝 놀란 적도 있다.

 

 무례하게 느껴질까 봐 기사님들께는 한 번도 여쭈어보지 못했지만, 어느 날 아빠에게 그 이유를 농담 던지듯 물었는데 아빠는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한 채 얼버무렸다. 나는 아주 오래 수동으로 전조등을 꺼야 했던 시대를 살아온 아빠와 기사님들이, 이제는 차량에 기본으로 장착된 그 기능을 'AUTO'라는 선명한 글씨를 마주하고서도 도무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늙어가는 일은 그런 습관과 고집이 쌓여나가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나 역시 여러 시기를 떠나보냈다. 스무 살 때 낙원상가에서 직접 산 하얀색의 일렉기타를 도서관 앞에서 중고로 팔아넘겼던 기억이 난다. 장기간 병원에 입원했다가 무사히 퇴원하며 가졌던 감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이 무색하게 나는 불평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다. 나무로 둘러싸여 5월이면 집 안이 온통 청포도색으로 변했던 빌라에서 자주 술과 음식을 차리고 초대했던 사람들과는 안부 정도만 전해 듣는 사이가 되었다. 뉴욕에서 함께 일했던 언니가 내가 뉴욕을 떠나던 날 쥐여주었던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했던 다짐과는 달리 안주하는 삶에 대체로 만족하며 살고 있다. 막 꽃이 지고 잎이 나던 4월 춘천에서 우연히 만난 첫사랑과는 봄답지 않게 뜨거웠던 5월에 대전에서 헤어졌고 사랑은 더 어려워졌다. 그때마다 단정적인 명제가 늘어갔다. 꿈은 꿈일 뿐이고 삶은 선택과 포기의 연속이며 사랑은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심에서 출발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 사람은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서도 결국 삶에 비겁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취직된 날 동생이 가장 처음 말했던 것은 직장 옆에 동굴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집을 구하지 못한 채 첫 출근을 하던 날 동생은 한 시간 반 정도의 출근 시간을 견뎌야 했지만 출근하는 길이 예뻐서 행복했다며 나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동생은 직장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작게 틀어놓고 자주 창밖을 내다보며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처음에는 출근길이 행복할 수는 없다며 핀잔을 주었지만, 동생을 데리러 갔던 날 나는 "여기 정말 좋다."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동생은 "맞지?"라고 말하며 웃고는 다시 상사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동생을 태운 차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려오며 나는 '동굴 옆의 직장'의 근사함을 생각했다. 인생은 그런 것이라며 단정 짓는 멋없는 어른이나 전조등의 자동 기능을 도무지 믿지 못해 끝내 수동으로 꺼버리고 마는 고집스러운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쓸쓸한 일이지만 그래서 직장이 동굴 옆에 있다는 사실에 이렇게 크게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삶은 동굴과 같은 미지의 세계와 지긋지긋하게 애증 하는 현실의 세계가 나란히 놓여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당연하지가 않아서 이렇게 소중한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동생의 불평에 맞장구를 치며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바람에서 어느덧 열기가 만져지는 계절이 왔다. 동생과 나는 수다를 떨며 탁한 하늘의 색과 아직 덜 무성한 연한 초록색 잎과 돌담에 쏟아질 듯 핀 영산홍이 만들어 내는 풍경을 바라보며 모처럼의 연휴를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다. 연휴는 곧 지나갈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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