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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May 18. 2020

마음의 소동

 마음에 소동을 일으키는 순간이 있다.


 요즘은 아무도 없는 교실에 출근하자마자 창문을 여는 순간이 그렇다. 우리 교실은 1층에 있고 창문 밖으로는 덜 자란 단풍나무가 몇 그루 심겨 있다. 맞은편으로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학교 건물의 외벽이 마주하고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작지 않은 공터가 있어 교실 안으로 볕이 예쁘게 든다. 창문을 열 때면 그 포근한 볕을 내가 교실 안으로 들여놓는 기분이 든다. 나는 조금 요란스럽게 창문을 열며 나뭇잎과 하늘이 함께 만들어내는 색을 필요보다 조금 더 내다본다. 행복하면서 울적해진다.


 문을 활짝 열고 청소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볕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는 꽃가루나 먼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음악을 틀어놓고 바닥의 머리카락을 줍는다. 괜스레 바닥과 테이블을 윤이 나도록 닦아보고, 조금 더 울적한 날에는 두꺼운 줄기와 꽃잎이 튼튼해 보이는 예쁜 색의 튤립을 몇 송이 사서 맥주잔으로 쓰는 컵에 꽂아 놓는다. 대각선 방향으로 줄기를 잘라주고 물을 하루에 한 번씩 갈아준다. 재빨리 시들고 마는 꽃을 보며 이제 다시는 꽃을 사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꽃집을 지나칠 때마다 꽃이 사고 싶어진다. 고작 하루 이틀 만에 뽀얗게 쌓이는 먼지를 보며 살아간다는 것은 쉬지 않고 먼지를 만들어내는 일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아주 느린 정돈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우스운 일이 조금은 단정해지는 것 같다. 내가 지니고 있는 염려와 조급함, 외로움과 초조함과 상관없이 그런 행위는 삶에 기품 같은 것을 부여해준다. 


 스페인의 남부에는 세비야라는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 나는 그 도시를 두 번 여행했다. 두 번 다 1월이었는데, 첫 번째 여행 때는 세비야에서 아주 독한 감기에 걸려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방 안에 누워만 있었다. 겨울에도 따뜻한 세비야에서 특히 더 날씨가 따뜻했던 날이었다. 기온이 23도까지 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날씨가 너무 좋았지만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살면서 그렇게 지독한 감기에 걸린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 내 눈에 세비야는 그 어느 도시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고 나는 기필코 세비야에 다시 오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3년 후에 나는 다시 세비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도 어쩐지 세비야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가로수로 오렌지 나무가 심겨있었던 것과 맥주를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 들렀던 레코드 샵뿐이다. 레코드 샵에서 나는 조금 취한 채로 흘러나오는 그럭저럭 괜찮은 음악을 들으며 샵 안에 있는 LP를 구경했다. 이국의 레코드 샵에서 또 다른 이국의 LP가 낡은 비닐로 포장되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의 LP도 있었고, 조금은 촌스러운 LP도 있었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만큼 멋진 커버의 LP도 있었다. 그곳에 머물면서 나는 어쩐지 황홀한 기분이 되어 사람이 여행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순간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이후로 여행을 가면 레코드 샵을 즐겨 찾는다. 레코드 샵을 찾아가면 두 가지 좋은 점이 있는데 하나는 레코드 샵에 갈 수 있어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레코드 샵 주변의 동네를 갈 수 있어서이다. 레코드 샵이 있는 동네는 근사한 동네인 경우가 많다. 살면서 처음 거니는,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거닐 일이 없을 그 거리를 걸으며 햇빛, 바람, 잡초와 벽에 그려진 낙서들, 아무렇게나 세워진 자전거, 산책하는 개와 주인을 본다. 레코드 샵에 도착하면 커버가 아주 탁월한 LP를 고르거나,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인 채 헐값에 팔리고 있는 LP 중 궁금한 것을 하나 골라서 산다. 한국에 돌아와서 음악을 들어보면 좋을 때도 있고 우스울 때도 있고 도무지 참기 힘들 때도 있다. 다시는 듣지 않을 종류의 음악이라면 보기 좋게 선반에 올려두어 장식하면 그만이니 나쁘지 않다. 그것을 볼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 그립고 마음이 찌릿찌릿해지기도 한다. 


 삶은 때로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완벽해진다. 가끔 그 사실이 터무니없으면서도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일부러 조금 더 느리고 요란스럽게 교실의 창문을 열었고 창문을 열면서 네 생각을 하고 조금 웃었다. 어쩐지 울먹여지는 웃음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맞이한 늦은 아침에는 덜 자란 단풍나무에 참새가 앉아 짹짹하고 청명한 소리를 냈다. 좋아하는 음악을 몰래 틀었다. 점심으로는 육개장 사발면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너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다. 마음이 어쩐지 소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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