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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un 15. 2020

자주 아무 이유 없이 뛰는 아이들

 술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사랑하는 단골 술집이 여럿 있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맥주를 편애하고 한두 잔으로 끝나지 않는 터라 대부분의 술집에서 큰돈을 쓴다. 그래서인지 사장님들과도 종종 친해진다. 나의 단골 술집은 내가 좋아하는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첫째는 음악이 좋은 곳이고 둘째는 맥주가 맛있는 곳, 그리고 셋째는 조도가 낮은 곳이다. 조건을 하나도 충족시키지 않는데도 이유 없이 편해서 좋아진 곳도 있다. 단골 술집이 있을 때 가장 좋은 점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서비스로 맛있는 안주 같은 것을 받을 때면 내가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알코올 섭취가 법적으로 가능해진 이후로 나는 여러 단골 술집을 지나쳐 왔다. 어떤 곳은 없어졌고 어떤 곳은 이전했고 여전히 있지만 특별하거나 특별하지 않은 이유로 가지 않게 된 곳도 있다. 어떤 곳은 아직도 열심히 찾아가서 신나게 취하고 서비스도 많이 받고 온다. 술을 마시는 일은 신나는 일이고 단골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일은 더 신나는 일이다. 나는 그 행위가 조금 귀엽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때로 아주 단순한 것이니까.


 단골 술집 중 작년 이맘때 문을 닫은 곳이 있다. 짧은 시간 동안 흥망성쇠를 겪은 경리단길의 좁은 오르막길에 위치했던 곳이다. 경리단길을 떠올리면 마음이 조금 애틋해지는데, 대한민국의 수제 맥주 전성시대를 연 곳이기 때문이다. 경리단길에서 문을 연 작은 양조장들 덕에 이제 수제 맥주를 편의점에서 네 캔 만원에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이 낮부터 작은 맥줏집 앞에 걸터앉아 햇볕을 쬐며 맥주를 마시던 풍경이 무척 이국적이었던 그때가 나는 가끔 그립다.


 나의 단골 술집은 그런 멋진 가게들과 함께 생겨났던 작은 LP 펍이었다. 나는 음악 취향이 나와 비슷한 동생과 함께 그곳에 자주 갔다. 이 펍이 근사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사장님이 오로지 LP로만 음악을 트신다는 점이었다. 사장님은 대단히 음악에 까다로운 사람이었고, 신청한 곡을 받으면서도 본인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틀어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아무리 바빠도 빼곡한 진열장에서 LP를 찾고, 비닐을 벗기고, LP를 꺼내어 분주하게 음악을 트는 사장님을 보며 조금은 예민한 사람이지만 멋지다고 생각했고 우리는 음악 얘기를 나누며 사장님과 친해졌다. 영업시간이 지나면 사장님은 문을 닫고 우리가 듣고 싶은 음악을 실컷 틀어주었고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데이비드 보위나 더 스미스, 뉴오더나 토킹 헤즈 같은 음악가들의 멋진 LP 커버도 구경할 수 있었다. 취한 날에는 음악에 맞추어 동생과 춤을 추었다. 다음날에는 어김없이 숙취에 시달리며 눈을 떴다. 가끔은 취한 덕에 후회할 만한 일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대부분 다 별일 아닌 일뿐이다. 저질렀던 바보 같은 행동은 대부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자주 아무 이유 없이 뛰는 아이들을 본다. 앞에 무엇이 있든지 신경 쓰지 않는 움직임. 옹기종기 모여있는 새들을 깜짝 놀라게 해 날아가게 하는 뜀박질. 뛰지 말라는 말을 일 초면 잊는 아이들. 항상 그 순간 뛰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아이들. 위험하다는 말로 제지할 수 없는 감정과 마음. 진초록이 무성한 한여름의 풍경, 그 뜨거운 무더위의 한가운데에서 폴짝폴짝 뛰는 몸짓을 보며 잠시 행복해진다. 도무지 참지 못하고 달려 나가야만 했을 때 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덥다는 말도 없이 땀을 흘리며 빨개진 얼굴로 그늘도 없는 모래밭을 달렸을 때. 어느덧 나는 결심하지 않으면 달릴 수 없는 어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러운 것은 여전히 나에게는 사랑스러운 단골 술집이 여럿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자주 가게 된 단골 술집은 음악도 좋지 않고 조도도 높고 맥주는 테라밖에 없는 고깃집이지만 차돌박이가 정말 맛있다. 그곳에서 아주 빠르게 익는 차돌박이를 지글지글 구우며 이상한 이야기와 불평을 나누고 많이 웃는다. 충동적으로 어떤 일을 저지르는 결심을 하고 잊어버리거나 모르는 척한다. 무뚝뚝한 사장님이 아는 척 말을 걸어오면 그 시간은 조금 더 귀여워진다. 스무 살 때와 같은 농도로 나는 이 시간을 사랑한다.  


 아무 생각 없이 뜀박질하기에는 그로 인해 생길 어려움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지만 때로는 섣부르거나 아둔해질 줄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동생과 그 멋진 LP 펍에서 조금은 부끄러운 모습으로 춤을 췄던 날이다. 오늘은 그 고깃집에 가서 차돌박이 대신 불고기 전골을 먹어야겠다. 물론 이 더운 날 빠질 수 없는 시원한 맥주도 같이. 월요일이지만, 아니 월요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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