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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ul 14. 2020

제주의 나주곰탕

 이번 제주 여행의 둘째 날 친구들과 나는 제주도의 남서쪽인 서귀포시의 안덕면에서 머물기로 했다. 근사하고 한적한 산방산 아래의 바닷가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예쁜 정원이 있는 안덕면의 숙소에서 여름밤의 바비큐와 함께 맥주파티를 열기로 했는데,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이 하나 있었다. 지인의 SNS에서 본 안덕면의 나주곰탕 집이었다. 제주도에서 나주곰탕이라니 좀처럼 내키지 않는 조합이지만 식당의 너른 창밖으로 잔뜩 펼쳐진 진초록색의 풀과 창가에 잔뜩 놓인 담금주, 그리고 그 앞에 세워진 커다란 오드리 헵번의 그림이 만들어내던 정답고 괴상한 풍경을 보며 언젠가 꼭 그곳에서 뜨끈한 곰탕을 먹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수욕 전의 든든한 한 끼는 나주곰탕으로 결정되었다.


 곰탕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내 선택이 아주 옳았다고 확신했다. 곰탕집의 넓은 마당에는 활짝 핀 수국과 함께 갖가지 식물이 잔뜩 심겨 있었고, 작은 의자와 커다란 항아리, 선명하게 출입구라고 쓰인 나무판자, 넓은 단면을 가진 돌이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놓여 있었다. 안은 더 놀라웠다. 곰탕집 안에는 사진에서 보았던 두꺼운 인삼이 담긴 담금주와 오드리 헵번의 그림뿐 아니라 영화 포스터, LP판, 낡은 텔레비전, 목이 꺾인 채로 파란색의 날개가 돌아가는 선풍기, 빈티지한 로고가 그려진 오래된 유리컵, 크고 작은 보해 소주병, 오락기와 계산기, 스피커와 시계 그리고 백과사전이 곳곳에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매우 정갈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오래된 물건에 둘러싸인 채로 우리는 따끈하고 맑은 나주곰탕을 한라산 소주와 함께 먹었다. 곰탕은 간이 잘 되어있었고 두껍게 썰린 깍두기에서는 곰탕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맛이 났다. 우리는 곰탕집에 있는 물건의 근사함, 물건을 모아 온 사장님의 성격, 곰탕과 깍두기의 맛, 그리고 곰탕집과 전혀 상관없는 것을 이야기하며 곰탕을 먹었다. 따뜻했고 배가 불렀다.


 우리 학교에는 매일 문을 단속하고, 복도를 순찰하고, 화단을 가꾸고, 학교 주변을 정리하는 숙직기사님이 있다. 기사님은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하교한 늦은 오후면 늘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하며 복도를 활보한다. 그는 뜨거운 땡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자주 볕 한가운데서 흙을 파고 색색의 꽃을 심는다. 덕분에 학교의 풍경은 자주 새로워지고 많은 사람이 그 풍경을 누린다. 나는 기사님의 검게 그은 피부와 굽은 등을 엿본다. 여전히 나이 들어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엄마는 'joyful aging'을 선포하고 실버 모델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실버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노년'이라는 뜻으로 실려있다. 그러면 엄마는 벌써 노년에 접어든 것일까 생각하다가 기분이 이상해져서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숙직기사님의 우렁찬 노랫소리를 듣거나 엄마가 어설프게 꼿꼿한 자세로 워킹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본다. 삶은 끝나기 전까지 대체로 충족되지 못한 상태로 흘러간다.


 최근에 강원도의 옥수수밭과 작은 계곡을 지나서 아무도 없는 길을 오래 달린 적이 있다. 폭풍과 같았던 애정과 증오와 즐거움과 아픔을 겪어낸 직후였다. 아무도 없는 차 안에서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들었다. 나의 어지러운 마음은 아랑곳없이 햇살과 풀과 바람은 뜨겁고 아름답고 평온해서 눈이 부셨다. 나는 그렇게 늘 그 자리를 지킬 아름다운 풍경을 통과하며 욕망하는 것을,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을 망치는 것을 생각했다. 결핍에서 오는 몸부림, 사실과 상관없는 감정의 소모, 내가 저지른 일과 앞으로 또 저지르게 될 일의 무용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일은 의미 없는 것이 의미 있게 쌓여가는 일이 아닐까. 나주곰탕 집의 사장님은 어떤 마음으로 그 많은 물건을 식당에 차곡차곡 쌓아두었을까. 아주 커다란 보해 소주병이 삶에 있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그냥 딱 보해 소주병만큼의 의미가 아닐까. 그는 이제 삶의 중년 즈음을 지나고 있을까. 나는 초년과 장년, 중년, 노년, 말년 중 어느 시기를 맞이하고 있을까. 새삼 그런 것은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 커다란 보해 소주병을 감상하며 아주 의미 있는 수십 분의 시간을 누리고서 해수욕을 하러 출발했다. 해수욕 전의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운 점심시간이었다.


 그날만은 모든 게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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