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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ul 29. 2020

잠깐 기타를 친 적이 있어요

 인디밴드의 공연을 보러 다니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부산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던 나는 어느 날 학교에서 친구가 "오늘 부산에 윤도현 온대!"라고 외치는 말을 듣고서는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에 처음 가게 되었다. 부산에서 매해 열리는 이 록 페스티벌은 국내에 생긴 수많은 록 페스티벌 중 가장 오래된 록 페스티벌이다. 당시 무료였던 공연은 입구도 없었다. 바다 바로 옆이 무대였다. 마음먹고 어떤 밴드의 공연을 보려고 그곳을 찾은 음악 팬과 지나가던 노인과 바다에 나와 있던 어린이와 그저 윤도현을 보려고 온 고등학생이 모두 함께 모여 공연을 보았다. 때로는 과격한 메탈 밴드의 공연이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해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무대 앞은 주로 음악 팬들의 차지였다. 나는 그날 윤도현을 가까이서 보려고 멋모르고 무대 앞에 자리를 잡았고 수많은 사람 틈에 서서 뛰고 부딪히고 발을 밟혀가며 공연을 즐겼다. 처음 접하는 그 공연문화는 나에게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매해 그곳을 찾았다. 그에 따라 내 음악 취향도 바뀌었다. 어쩌면 그 일은 내 인생을 통째로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인디밴드를 좋아하게 되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대학가 앞에 있는 클럽에서 열리는 소규모의 공연도 자주 보러 다녔다. 클럽에서도 서서 뛰고 부딪히고 발을 밟혀가며 공연을 즐겼다. 가끔 유명한 인디밴드가 부산의 작은 클럽의 무대에 섰다. 좋아하는 밴드가 여럿 있었고 그들이 부산에 공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나는 어느 유명한 음악가가 내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보다 더 기뻤다. 그렇게 당시 내 삶의 목표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는 것'이 되었다. 나는 부산에서는 가뭄에 콩 나듯 볼 수 있는 인디밴드의 공연을 홍대 앞 클럽에서 매일 볼 수 있어야만 했다. 절실하고 아름다운 꿈이었다. 두 번째 목표는 기타를 치는 것이었다. 기타를 친다면 유명한 펜더사의 민트색 기타를 사고 싶었다. 나는 내가 민트색 기타를 메고서 여유로운 몸짓으로 기타를 치는 모습을 자주 상상했다.


 꿈을 이뤘다는 말은 좀처럼 쓰기 어려운데 나는 꿈을 이루어 스무 살 때 서울에 왔다. 그때 서울이란 나에게 지금의 파리, 밀라노, 베를린 아니면 뉴욕과 같은 도시였다. 내가 얼마나 신이 나 들떠있었는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심지어 내가 가장 좋아하던 밴드가 자주 공연을 하던 클럽은 내가 머물던 하숙집에서 3분 거리에 있었다. 학교에서 밴드 동아리의 오디션 벽보를 발견한 날 나는 일단 기타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기타를 사야지만 레슨도 받고 오디션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처음 기타를 사러 가던 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는 종로에 있는 낙원상가에 갔다. 아는 사람이 낙원상가의 상점 하나를 소개해 준 참이었다. 초보자에게 적합한 저렴한 기타를 좋은 가격에 살 수 있으리라고 했다. 내가 사고 싶었던 펜더사의 민트색 기타는 당시의 내가 사기에는 너무 비쌌다. 나는 보통의 전자기타보다 조금은 더 무게가 나가던 하얀색의 기타를 15만 원 남짓에 샀다. 상점 주인은 기타를 검은색의 기타 가방에 넣으며 앞주머니에 색색의 피크도 함께 넣어주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그 가방 안에 담겼다. 가방을 메고서 상가 바깥으로 나와 허름한 국밥집과 인사동을 지나 낡은 건물과 화려한 빌딩이 한데 모여있는 종로의 거리를 세상을 다 가진 기분으로 한참 걸었다.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사서 오디션을 보러 온 나를 선배들이 좋게 보아준 덕에 나는 밴드 동아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오늘 부산에 윤도현 온대!"라고 외쳤던 친구와 함께 마을버스를 타고 한적한 동네에 있는 낡은 건물의 지하실에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친구는 베이스를 쳤고 나는 기타를 쳤다. 레슨을 받는 일은 주로 지루했고 나는 언제쯤 쟈가쟝쟝하는 소리를 내며 신나게 연주를 하게 될까 이야기하며 자주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시절 투덜대며 무거운 기타를 메고 구부정한 자세로 레슨실에 가던 일보다 더 재밌는 일은 없었다. 레슨을 받으러 가는 날에는 기타를 메고 학교에 가야 했는데 그런 날이면 나는 계절을 느끼기 좋은 언덕 위의 목련 나무 아래에 앉아 김밥을 먹었다. 나는 갖가지 감정으로 충만해져 한참 동안 그곳에 앉아있기를 좋아했다. 그 충만함의 팔 할은 곁에 세워진 기타 덕분이었다. 


 의지가 부족한 탓에 나는 생각보다 빨리 기타 치기를 그만두었다. 하얀색의 일렉 기타는 내가 자주 가던 도서관 앞에서 누군가에게 중고로 팔아넘겼다. 기타를 사던 누군가의 기쁜 표정이 생각난다. 아쉬웠지만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그래도 쉬운 곡의 세컨드 기타 정도는 칠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두 번 무대에 선 적이 있다. 한 번은 학교에서였고 한 번은 내가 좋아하는 밴드가 자주 공연하던 하숙집 근처의 클럽에서였다. 두 번 다 메탈리카의 '엔터 샌드 맨'이라는 곡을 연주했다. 그때 나는 너무 긴장해서 어떻게 그 시간이 흘러갔는지조차 느끼지 못했다. 엉망으로 연주를 한 것 같은데 아무도 나를 힐난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헤어스타일을 했었는지까지 정확히 기억나지만, 무대에 섰던 날이 나에게 그리 감격스러운 순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제는 기타리스트가 되기 위한 짧은 역사 속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기타를 메고서 낙원상가를 나섰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순간에 내가 지녔던 발걸음과 불었던 바람, 지나쳤던 종로의 돌담길과 탑골공원의 노인과 인사동의 수많은 사람, 오래된 국밥집에서 나던 돼지고기 냄새, 가로수의 잎이 바람에 흔들리던 소리. 종로는 여전히 서울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이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서는 알랭의 행복론을 인용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오지 않는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된다.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할 게 없는 자에게 화 있으라. 그는 가진 것을 모두 잃는다.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이다." 삶은 어쩌면 충족되기 전에 가장 충족되는 것일까. 바라는 대로 종결되지 못한 관계, 원하는 대로 이루지 못한 목표, 끝내 끝내지 못한 모든 것. 가장 선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마음은 결국 그 시작과 중간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그런 일을 떠올리며 글을 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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