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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ul 21. 2020

마르지 않는 감정

 동생은 빨래를 좋아한다. 세제에 모든 균이 씻겨나간 후 마른 수건이 주는 청결한 느낌은 동생의 삶에서 작지 않은 행복 중 하나라서 동생은 빨래를 1주일에 서너 번은 한다. 바삭하고 깨끗하게 빨래를 말리기 위해 제주도에 살던 시절 그 습도 높은 섬에서 동생은 화장실의 환풍기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싸구려 제습기를 밤새 틀어놓고 빨래를 말렸다. 그렇게 열심히 빨래하는 동생을 보고 있자면 존경스러운 마음마저 든다. 나는 빨래가 귀찮다. 빨래를 모으고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세탁기에 세제를 넣고 빨래를 널고 빨래를 말리고 빨래를 개는 모든 과정 중에서 귀찮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빨래가 마르려면 적어도 하루가 넘게 필요한데, 하루가 넘게 걸리는 집안일이라니 이보다 더 번거로울 수가 없다. 심지어 비가 오는 날이면 마르지 않는 빨래 때문에 하루가 아니라 며칠씩이 걸리기도 하고, 그런 날에는 덜 마른 빨래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 빨래를 한 번 더 해야 할 때도 있다. 오랜 시간에도 채 마르지 못한 빨래에서 나는 냄새는 섬유 곳곳에 배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주에 가방 안에서 아침에 편의점에서 산 커피가 터지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플라스틱으로 된 편의점 커피가 그런 식으로 터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나는 커피가 가죽을 흠뻑 적시고 바깥으로 뚝뚝 떨어질 때까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가방 안에는 얼마 전에 친구의 책방에서 산 에세이집 하나가 들어 있었고 책의 반 정도가 커피에 흠뻑 젖어버렸다. 마침 장마 기간이라 그런지 그때 축축해진 페이지들이 여전히 눅눅하다. 바스락거리지 않는 종이를 넘기며 책을 읽는데 어쩐지 울컥한 마음이 되었다. 쉽게 마르지 않는 것들이 상기되어서였다.

 

 나쁜 기억은 많지만 나쁘기만 한 기억은 찾기가 힘들다. 그런 일이 떠오를 때면 기분이 울상이 된다. 마르지 못한 빨래에 배어있는 냄새처럼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감정, 책에 남아버린 커피 자국처럼 남아있을 흔적.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너와 함께 메마른 바다 풍경을 지나 처음 건넜던 다리,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무뚝뚝한 닭꼬치 집에서 네가 건네었던 시답잖은 농담 같은 진심, 어쩐 일인지 별로 맛이 없었던 유명한 식당의 돼지국밥, 항상 조급했던 너의 발걸음, 네 목에 근사한 스트랩과 함께 걸려있던 중고 카메라, 카메라를 가지고 네가 사진을 찍던 뒷모습과 오래된 횟집에서 만났던 두 마리의 강아지, 그런 풍경 속에서 좀처럼 찾을 수 없던 우리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하려 노력했던 수일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 너 역시 그럴 것이라 믿고 싶었던 일.


 어떤 기억은 필요 이상으로 미화되어 그리움을 떠안긴다. 얼마나 불필요한 일인지 알기에 그러지 말자고 마음을 되잡다가 나는 문득, 애써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더 아름답게 기억해도 괜찮지 않냐고, 내 생각과 사실이 다르더라도 상관없지 않냐고, 마르지 않는 감정이 나의 구석구석에 남아 예기치 못한 순간 울컥하고 눈을 달구는 게 그리 나쁘지 않지 않냐고, 그런 것이 없다면 우리가 견뎌내야 할 긴 시간이 너무 멋없지 않겠냐고, 때로는 마음을 그저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고. 그 사실만으로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니 나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아마 멀지 않은 하루에 나는 또 아플 것이다. 그럼에도 잊으려고만 했던 기억에 자리를 내 줄 용기가 생겼다는 사실이 오늘만큼은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나쁘지만 나쁘지만은 않은 사건이 남은 시간 동안 나에게 더 많이 일어나기를. 그런 일은 늘 아픔을 동반하지만 마르지 않는 감정을 내 삶에 던져준 것으로 충분했다고. 아름다운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시간은 결국 아픔과 함께 온다고.


 자주 울게 되더라도 많은 사랑을 뒤돌아보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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