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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Dec 22. 2020

그냥 지고 싶을 때

 그 애와 연락을 끊은 이후로 나는 날마다 그 애의 꿈을 꾸었다. 그 애는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게 하거나 행복하게 했다. 꿈에서 겪은 괴로움이나 행복과 관계없이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또다시 그 애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는 생각 때문에 불행했다. 그 애 생각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꿈을 꾸고 나면 어쩔 수 없이 또 그 애 생각이 났고 생각을 하고 나면 그 애가 또 꿈에 나왔다.      

 

 그 애는 내가 살면서 만난 연애 상대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겁이 많고 연약한 특성을 가진 사람처럼 여겨졌지만 대체로 사납고 불안했다. 나는 그 애와의 사랑을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두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만큼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 애와는 작년 이맘때쯤 처음 만났다. 서울로 여행을 온 지인이 이태원의 구불구불한 언덕 꼭대기에 빌린 숙소에서였다. 냄새가 빠지지 않는 작은 부엌에서 그는 다른 이들이 술을 마시는 동안 혼자 오래된 프라이팬에 삼겹살을 굽고 어설프게 홍합탕을 끓였다. 나는 그곳에서 맥주를 많이 마셨고 그를 포함한 몇 명의 이들과 의미 없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며 자주 웃고 떠들었다. 지금과 같은 연말이었고 사소한 일에도 자리는 떠들썩해졌다. 안주는 대체로 맛이 없었고 술은 늘 그렇듯 맛있었다.

 

 두 번째 만남은 을지로에서였다. 유명하지만 가본 적 없던 선술집에 그를 데리고 갔다. 그날도 안주는 대체로 맛이 없었고 술은 언제나처럼 맛있었다. 그날 그 애는 내 글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수줍게 건넸다. 잘 몰랐지만, 그 말이 큰 용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애를 데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에 갔다. 나는 그 애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면서도 자꾸 그 애를 보며 궁금하다고 말했고 그 애는 나의 사소한 개인사를 질문했다. 나는 정성껏 충분하지는 못하게 대답했고 그 역시 그랬다. 그래서 그날의 대화는 종종 겉돌았지만, 이상하게도 완벽했다. 나는 그 애가 몹시 가득 찬 마음으로 궁금했다.      

 

 그런 일상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동안 이어졌다. 나는 그 애와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동안 가슴이 자주 두근거렸는데 두근거림은 설렘과 불안을 동반했다. 그 애는 자주 화를 냈다. 그 애가 보이는 분노의 원인을 파악하며 보내는 하루하루가 늘어갔다. 그 애는 동시에 유아적이었고 단순했다. 그런 곳에서 그 애의 다정함을 엿보았다. 어쩌면 그런 면모를 찾아내려 애썼을지 모른다. 미웠지만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왜 그 애의 꿈을 매일 꾸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정답은 늘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 애와 더 만나면 안 되었다. 그 애와의 관계가 동반할 아픔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애가 보고 싶었다. 항상 그랬다.     

 

 얼마 전에 강원도 여행을 가서 올겨울의 첫눈을 보았다. 여행에서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게임을 하며 유쾌하게 웃었고 잊고 있었던 노래를 들으며 조금 울었다. 가을의 아름다운 풍경이 사라지는 것을 조급해했었는데 강원도에서 마주한 겨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자주 할 말을 잃었다. 차갑고 청명한 공기 속에서 드러난 나무의 갈색 결을 마주하면서 가을이 지날까 어쩔 줄 몰라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2박 3일간의 여행 후 동생은 자연과 멀어지는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힘들어했다. 동생은 일 때문에 먼저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나를 뒤로한 채 밤까지 강원도에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할 말이 많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생도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조금 미련하게 끝을 부여잡을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그냥 지고 싶을 때가 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에 지고 울고 싶은 마음에 지고 게으르고 싶은 마음에 진다. 화를 내고 싶은 마음에 지고 미워하고 싶은 마음에 지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진다. 어쩌면 그게 역전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주어진 정답을 뒤엎고 도망가는 일. 삶에 필요한 것이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를 그 애와 함께 보낼 것이다. 내일은 겨울에 어울리는 단팥빵과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그 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요즘에는 그 애의 꿈을 더 꾸지 않고, 조금만 더 지기로 한 내일에는 다행스럽게도 그 애 때문에 또 아프고 기쁠 수 있다.      

 

 그 애를 마음껏 보고 싶어할 수 있는 오늘 밤에는 아주 따뜻한 꿈을 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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