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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un 29. 2020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뉴욕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스물넷 시절의 일이다. 수많은 어학연수생들이 불법인데도 뉴욕에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그때 내가 뉴욕에서 받을 수 있는 시급은 7달러였다. 당시 그곳의 최저시급은 10달러 정도였는데 많은 사장님이 불법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최저시급보다 더 낮은 시급으로 일을 시켰다. 그런 사장님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7달러라는 시급은 당시 한국에서 받을 수 있는 시급의 두 배가량이었고 나는 충만한 호기심과 의욕, 염려와 불안을 지닌 채로 낯선 땅에서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곳은 이스트 빌리지라는 동네에 있었다. 이스트 빌리지는 당시에 일본 식당이 많기로 유명한 동네였고 그래서인지 한국 식당도 몇 개 생겨나는 참이었다. 일본 식당이나 한국 식당을 제외하고도 귀엽고 아기자기한 카페나 작은 음식점, 빈티지 숍이 모여있던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동네였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곳은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작은 스무디 가게였다. 나는 뉴욕의 젊고 힙한 동네에서 스무디를 만들게 되었다는 사실에 묘하게 흥분되어 있었고 동시에 무척 두려웠다. 한국에서도 제대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렘과 불안함을 지닌 채로 출근한 지 이틀 만에 나는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을 문자로 통보받았다. 내가 단 이틀 만에 잘린 이유는 '가위질을 못 해서'였다. 지금은 이 에피소드를 우스갯소리 하듯 얘기하고는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작지 않은 상처였다. 처음 일을 배우던 날, 사장님은 나를 지하의 창고로 데려가 스무디 파우더가 잔뜩 쌓여있는 곳을 알려주었고 그중 하나를 꺼내어 통에 담도록 했다. 파우더가 담겨있던 비닐봉지는 꽤 컸다. 커다란 봉지를 가위로 잘라서 파우더를 통에 옮겨 담아야 했는데 봉지가 잘 잘리지 않았다. 사장님은 봉지를 자르지 못하는 나를 앞에서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고 나는 내가 얼마나 못 미더울지가 정확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틀 만에 잘리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싹싹한 동생과 늘 비교를 당했다. 그래서 '싹싹하다'라는 말을 보면 동경의 느낌마저 든다. 나는 싹싹하다는 말을 듣는 동생 옆에서 눈치가 없다거나, 행동이 굼뜨다거나 어설프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어렸을 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면서도 어떤 게 정확하게 '싹싹한' 것인지 잘 가늠이 가질 않았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못한다'는 말을 듣는 것 같아서 기분이 울적했다.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자주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고기를 구울 때면 앞에 있는 사람이 답답해하며 가위와 집게를 빼앗아 갔다. 그런 일을 자꾸 겪다 보면 잘하려고 애쓰는 마음에 고기 굽는 손짓이 더 어설퍼진다. 고기도 잘 잘리지 않는다. 스무디 가게의 공포가 되살아난다. 악순환이다. 엄마는 내가 채소를 썰 때마다 손을 벨까 봐 안절부절못한다. 실제로 손을 벤 적은 거의 없는 데도 말이다.


  어떤 것이 싹싹한 것인지 어느 정도 알게 된 무렵부터 나는 싹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여전히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사람들과 모여 밥을 먹을 때 숟가락 젓가락을 놓는다던가 물을 따라놓는 일은 대본처럼 기억하고 재빠르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더더군다나 선생님이 되어 수많은 학부모를 상대하게 되었으니 어렸을 때와 비하면 일취월장한 셈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싹싹하지는 못한 사람이다. 내가 무엇을 해도 싹싹해 보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매사에 어설픈 사람이다. 그것은 내가 결국에는 채소 썰기나 고기 굽기를 해낼 수 있다는 사실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나는 그런 나의 특성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로 했다. 고기를 구울 때 누군가 답답해하면, 이제는 주눅 들지 않고 보기에만 그렇지 엄청나게 잘 굽는다며 가위와 집게를 내어주지 않는다. 채소를 써는 나를 엄마가 초조하게 쳐다보고 있을 때면 또각또각 예쁘게 채소를 썰어 엄마에게 자랑해 보인다. 그러면 싹싹하지 못해도 많은 것이 충분해진다.


 괜찮다는 말 보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더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어쩔 수 없는 것은 내 탓이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자주 어쩔 수 없음을 완전하게 깨닫는 순간까지 끝을 향해 달려간다. 중간에 멈추면 결국에는 다시 뒤돌아보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끝을 향해 가는 여정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렇게 끝까지 가다 보면 종종 상처를 받고, 불행해지고, 오랫동안 낮은 곳에 머물러 있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음이 나는 몹시 아프고 조금 고맙다. 많은 것을 사랑하고, 기대하고, 욕구하고, 소원하고, 희망하게 되는 삶에서 어쩔 수 없음이란 필연적일 테니까. 종종 자신에게 되뇐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그것이 어떤 일이든, 이 말은 그 날의 아픔에 위로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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