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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Mar 23. 2020

거창하고 초라한

 나는 그를 처음 만난 날에 그에게 반했다. 우리는 간장새우와 연어회를 청하와 함께 먹었는데 안주의 대부분은 누구의 입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빠르게 말라가고 있었다. 수많은 이야기를 하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그가 콕 집어 이야기했을 때부터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리는 10년 전쯤 들었던 한국 인디음악에 관해 이야기했고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음악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음악가의 ‘너와 나의 20세기’라는 노래 제목을 가지고 귀여운 농담을 했다. 내가 웃으면 그는 좋아했다.    


 그는 자주 나에게 깜짝 놀랄 말을 했다. 그런 말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는데, 하나는 지나치게 근사한 부류였고 또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당황스러운 부류였다. 하지만 두 부류 모두 누구에게서도 겪어보지 못한 대화방식이라는 점에서 내게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당황스러운 부류는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할 소지가 있기도 했지만 나는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나는 아주 많이 웃었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더더욱 당황스럽고 근사한 말을 쏟아냈다. 그러다 나에게 그는 “지원 씨는 어딜 가든 마스코트 같은 존재겠어요.”라고 말했는데, 당시에는 칭찬일까 의아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칭찬이 분명하다 여겨지는 이 말 때문에 그에게 완전히 반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나로서의 나를 발견해주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했던 근사하고 당황스러운 말을 나열하고 싶지만 그럴 용기는 나지 않는다.     


 우리는 버스터미널 앞에 있는 치킨집에서 자주 만났다. 그냥 치킨집도 아니고 ‘바른 치킨’. 치킨에 소주를 시키며 우리는 홍상수의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왜 홍대 앞에 있는 2층 치킨집에서 대낮부터 소주에 치킨 먹는 영화 있잖아?” 

 나는 그와 바른 치킨에서 바르지는 않지만 거창한 일을 많이 꾸몄다. 그곳에서 오갔던 그와 나 사이의 대화와 웃음을 자주 떠올린다. 늘 그랬듯 마음에 쏙 들었던 그의 농담, 자주 몸이 좋지 않아 반쯤 감겨있던 그의 눈과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던 그의 눈빛, 종종 마주 잡았던 손, 그의 적은 머리숱, 알이 아주 두꺼운 뿔테 안경과 깎여있지 않은 수염, 영원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만큼 즐거웠던 대화, 맛을 느낄 수 없었지만 괜찮다고 말하며 먹었던 프라이드치킨, 소주잔에 따라 마셨던 맥주, 그곳에서 나와 작은 버스정류장에서 그와 함께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초조하게 좋았던 시간.      


 간판에는 가장 거창하고 초라한 것이 한데 모여있다. 휘황찬란한 그림, 유행에 뒤처진 색의 조합과 함께 위풍당당한 글씨체로 희망슈퍼라던가 궁전 미용실, 21세기 호프 같은 이름이 쓰인 간판들. 때때로 그 거창한 초라함은 시간의 힘을 얻어 이전과는 다른 매력을 지니게 되기도 한다. 나는 그런 간판들을 볼 때면 거창함과 초라함이 지닌 상반된 의미만큼이나 상반된 감정을 느낀다. 쓸쓸하면서 따뜻하기도 하고 슬프면서 행복하기도 한, 늘 그런 식으로 동그라미처럼 이어진 감정 말이다. 아직은 완전하게 알아채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버스터미널 앞의 그 치킨집에 갈 일은 더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모든 이야기에 단련되지 못한 채 자주 희망 슈퍼나 궁전 미용실처럼 거창하고 초라한 기분이 된다. 거창하기만 하거나 초라하기만 하다면 이렇게 쓸쓸해질 필요도 없을 텐데 둘은 대부분 같이 온다. 여전히 그 치킨집을 지나칠 때면 눈물이 찔끔 난다. 눈물이 찔끔 나는 내가 초라해서 아주 크게 도리질한다. 도리질하면서 또 그곳에서 겪었던 거창한 장면들을 떠올린다.      

 

 종착역에 도착한 열차에서 “승객 여러분들은 모두 내려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를 들으며 내릴 때면 더 갈 곳이 없어 불이 꺼진 열차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할 때가 있다. 내가 이곳에서 내리지 않고 앉아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열차는 잠시 쉬었다가 또다시 사람들을 태워 다음 여정을 떠나겠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때로 견디기 힘든 일이라서, 곧 초라해질 줄 알면서도 또 다른 이야기를 기대한다.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막 즐거움을 시작하는 소리, 아직은 끝을 모르는 소리, 알면서도 또다시 무엇인가를 저지르는 소리, 그런 소리를.      

 

 결국 세상은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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