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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Mar 07. 2024

벗은 신과 발

퇴고 없이 단번에 쓰는 글

남자의 손가락이

가죽 위에서 원을 그린다 발이 있던 안에 손을

아무렇지 않게 넣고 표면을 문지르며

땀도 흘리지 않고 검게 얼룩진 목장갑을 손수건처럼 들었다

꿀과 물로 벌어진 틈을 메우더니 나사못을 턱 하니 박아둔다

입을 벌린 채로 숨을 몰아 쉬는 구겨진 구두


한 번 닦고 가세요

싫은 소리를 못하는 걸 어떻게 아시고

여기 구멍이 숭숭 뚫려 있구먼

칠해 주세요 속이 안 보이도록

오천 원이오


구두는 간판 불빛 아래서 번들번들 빛나고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서 말을 할까 말까 지금이라도

슬리퍼를 두고 왔다는 핑계를 떠올렸다 꽉 묶인 신발끈처럼 마구 풀어헤치고

한 마디 했어야 했나 밑창에 박힌 나사못을 빼는 건 왜 항상 정해져 있는 것인지


당신은 구두를 손톱으로 긁어본 적이 있나요

나는 맞춤법을 틀리는 사람이 싫어요 세상 혼자 사는 것처럼

허리도 숙이지 않고 혼자 힘으로 구두 하나 닦지 않는 사람은 근육이 없으니까요

손톱에 때가 하나도 안 껴 있는 사람 마스크를 절대 벗는 법 없어


남자는 열린 문을 열어 둔 채 가라고 했다

참은 숨을 내쉰다 컨테이너 안에는 난로가 켜져 있고

바깥의 공기는 이곳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문은 구멍이 아니다

운동화도 취급하나요 나사못은 바닥에 던져버렸어요 발바닥은 밑창만큼 딱딱하지 않아요 발바닥 대신

신발장 아래 칸에 놓여 있는 운동화를 떠올리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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