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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Mar 16. 2024

광장

퇴고 없이 단번에 쓰는 글

미술관 옥상 위에 남자가 서 있다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찡그린 표정으로 뛰어간다

똑같은 모퉁이를 세 번 도는 사람에게는 말을 걸고 싶다


오랫동안 보여주고 싶은 일기가 있어

어제 있었던 일은 애써 기억하지 않기로 한다

모든 걸음을 기록하지 않듯

잘 나온 프로필 사진을 바꾸지 않은 채 졸업을 했다


돈가스를 먹으러 남자 셋과 여자 둘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둘이 고민하는 동안 셋은 반찬과 물을 나르고 셋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둘은 창밖의 사람을 관찰한다 넷이 먹으면 하나는 사진을 찍고 하나가 화장실에 가면 넷이 웃는다

우리는 끝까지 가자

잘못 나온 메뉴를 대신 먹던 남자가 입가에 소스를 묻힌 채 선언한다

하나가 기침을 하고 하나가 휴지를 뽑고 하나가 웃는데 하나가 화장실로 떠난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않는다 잔디밭에서 뒹군 일도 가로등 밑에서 고양이를 한 시간 넘게 기다린 일도

오늘도 휴대폰의 사진을 백업하는 것을 잊었다 잊은 김에 내일로 미루었다


선두에서 꽹과리를 치는 남자는 즐거움을 경계한다

모퉁이의 볼록 거울을 바라보며 연인은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든다 어느 한쪽이 먼저 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쌍둥이는 서로의 탄생을 바라볼 수 없다

길바닥에 떨어진 떡꼬치를 비둘기가 쪼아 먹고 있다 한동안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나는 너의 잠시 후를 기다리고 있다


먼저 들어온 손님보다 먼저 일어난다 그가 겉옷을 걸친 모습을 알지 못한 채

매장 영업은 아홉 시까지이고 저녁은 그보다 빨리 끝난다

사물놀이패는 뿔뿔이 흩어지고 박수를 치던 사람들은 그보다 먼저 사라진다

광장은 그날의 연주를 기억한다 구경꾼들은 어제의 기분을 기억한다

비둘기는 매일 다른 먹이를 먹고 연인은 밤이 오기 전에 옷을 갈아입고 각자의 집으로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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