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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Mar 27. 2024

백색소음

퇴고 없이 단번에 쓰는 글

같은 말을 다섯 번씩 하지 않는다

겨울옷이 걸려 있는 행거에 여름옷을 꺼내 걸어 둔다

정치인이 간장도 없이 어묵을 먹는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고 잠에 든다


언제 한 번 놀러 오라는 말은

잔소리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다

처음 보는 가수가 웨딩드레스 같은 옷을 입고 오페라를 부른다

스피커가 지지직거려 소리를 줄인다 전자레인지의 파동이 방구석구석을 헤집는다

종이 울릴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린다 가만히 있다 동시에 일어나면 우리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서로의 이마에 붉은 손자국을 내고는 했다

창밖에는 우뚝 솟은 나무가 해를 가리고 있다

눈을 감고 웅크린 채 낮을 보내고 젖은 머리를 말리며 밤을 맞았다

끝말잇기를 하다 보면 언제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말 속으로 파고든다 이리듐 리놀륨 포타슘

뒤를 이을 수 없으면 끝나는 놀이 말도 안 되는 말로 시작하는 말을 찾지 못하면 지는 거라고 했다

웃어도 소용없어 앞머리를 올리고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눈썹이

새의 꽁지깃처럼 파르르 떨렸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보았던 <나 홀로 집에>가 올해는 방영되지 않았다

한 줄짜리 뉴스 자막으로는 강을 수놓는 다리가 끊어지고 비행기가 숲으로 곤두박질치는데

나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불러도 대답도 없고


습지의 갈대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조금씩 위로 자란다

정자에는 낮술을 마시는 아저씨와 아줌마와 모로 누워 자는 연인

식당의 줄은 문을 열기 전에 생기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면 사라진다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데 아무도 찡그리지 않는다

오는 길에 아는 얼굴을 본 것 같아

뒤돌아 인사를 건네려 말을 고르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신발 앞코로 벽을 툭툭 치다 바닥에 주저앉는다

대책 없이 웃어도 갈대는 따라 웃지 않는다


갈대는 지평선 위에 눈썹처럼 자라나 있고

아주 작은 점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주워 들고는 손바닥 위에 올려 이리저리 굴려본다

귀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노래가 끝나고 화면에서 가수가 사라지고 TV는 눈부신 하얀빛으로 빛나고 있다

나무가 쓰러져 있다 바닥에 누워 있다

창문 한가운데 해가 박힌 채 멈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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