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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Aug 08. 2023

좋은 소설은 글을 쓰게 만들지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리뷰 1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희영은 열어놓은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79쪽 [몫] 중에서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문학동네


 뭔가 표현하고 싶지만 설명할 길 없는 마음의 어려움. 맞는 얘기 같지만 불편한 글들. 뭐라도 표현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자책. 공허한 다짐과 결심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괴감.

 이 구절을 읽던 밤, 휘몰아치던 감정들에 놀라며 오래 생각에 잠겼었다. 시간이 흐른 뒤 가만히 가라앉던 마음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고마움'이 아닐지.

 글을 읽는 사람으로서의 고마움은 이런 거다. 나라면 결코 언어화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어떤 마음을 곡진하게 표현해 주어서, 이토록 세심하고 따스한 심정을 지닌 소설가가 있어서 고마운 마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고마운 이유도 있다. 이렇게 좋은 글을 나는 못쓸 테지만 그럼에도 쓰고 싶게 만드는, 가만한 위로가 페이지마다 스며 있다는 것.

 요즘 내게 글을 쓴다는 건 괴롭고 어렵고 늘 벽에 부딪치며 주르륵 주저앉는 일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쓰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벽 너머 혹은 벽의 갈라진 틈으로 보이는 어떤 빛을 간절히 찾기 때문이라는 걸 최은영 소설집을 읽으며 절감한다. 내게 이 소설 제목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다시 일어서고 다시 쓸 수 있을 거라는 작가의 다정한 격려처럼 들린다.

 내게 좋은 소설은, 글을 쓰게 만드는 소설.


읽다가 자꾸 메모장에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일년'이라는 작품에서는 '서운함'에 대한 작가의 탁월한 정의에 놀라며 가슴깊이 숨겨둔 내 마음을 글로 적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웃으며 사무실을 나왔지만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115쪽 [일년] 중에서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문학동네

 서운함을 느끼는 대상이 종종 있었다. 나의 일방적인 감정이라는 걸 인지하기까지 오랜 마음의 부침이 있었다. 상대방은 아무 책임이 없는 감정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나자 조금은 그 불편한 감정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라는 구절, 저릿하다.

 상대방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내멋대로 쌓아온 애정. 그로 인해 기대하는 것들. 당연히 그러리라 짐작하는 어떤 착각들. 상대방은 사실 아무 책임 없는, 내가 자초한 감정들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는 마음이 서운함일 수도.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라는 문장은 조금 쓸쓸하다. 나에게는 가까이 붙어있는 감정이 하나 더 있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이 불러 일으키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쓰라리면서도 그립고, 돌이킬 수 없는데도 미련이 남는, 뒤죽박죽인 감정.


그래서일까. 이젠 서운함 같은 건 느끼고 싶지 않아서 아예 기대조차 하지 말 것, 하고 다짐하는 나에게 오히려 서운함을 느낀다. 예전 만큼 사람을 열심히, 그리고 열렬히 사랑하지 않으려는 그 감정은 무엇에 가까우려나.
아무튼 곁에 둔 소설책 한 권이 달콤씁쓰레하다. 그런데도 이토록 든든하고 큰 위안이 될 수 있다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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