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잡지]캠플 2017-04월호, 대학내일 812호

대학생활과 대학생, 그리고 공감에 대하여

by 이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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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플러스 2017-04월호(좌)와

대학내일 812호(우)


사진 출처 : 캠퍼스 플러스, 대학내일의 페이스북 페이지


* 매일 하나의 리뷰(혹은 글쓰기) 17일 차

* 본 리뷰에는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있습니다


1. 들어가며


오늘도 마감할 거리를 찾아 학교 안을 배회하던 중이었다. 물론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고 '소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가만히 앉아서 마감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불편하게 쉴 바에야(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일을 미루는 것을 참 잘한다.) 찾는 척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일단 걸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어슬렁거리기 초심자의 행운'이라도 되는 것인지 '마감할 거리'가 눈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교내 신문 옆에 쌓여 있던 '캠퍼스 플러스(이하 캠플) 2017년 04월호'와 '대학내일 812호'였다.


사실 대학에 다닌 지 햇수로 6년 차지만 이 '무료 잡지'들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관심이 없기도 했고, 혹 읽어볼까? 하고 찾으면 이미 동나고 없었던 경우가 많았기에 그냥 있나 보다- 하는 잡지들이었다. 그래도 이번 기회로 졸업 전에 '대학을 주제로 삼는 잡지들'도 읽어보고, 마감도 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2. 캠플과 대학내일


두 잡지의 차이점과 편집 방향을 전문적으로 논하기엔 나의 능력(비평, 분석하는 능력)이 모자라고, 데이터도 부족(읽을 수 있는 책은 오직 4월호와 812호뿐이기에)해서 이번 리뷰는 '느낌' 위주로 서술된다. 더불어 대학에 대한 나의 생각 위주로 글을 쓸 예정이다.(매거진 이름이 괜히 '내 맘대로'는 아니겠지.)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캠플은 월간지이고 대학내일은 주간지라는 점이다. 때문에 수록된 콘텐츠의 내용과 방향성도 차이가 있다. 먼저 캠플에는 많은 '목소리'가 담겨있다. 글이 많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학일기.jpg 네이버 웹툰 <대학일기>는 '대학생활의 공감되는 상황들'을 그린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웹툰 - 겟짤


각종 인터뷰(가수, 국회의원, 회사 등)와 캠퍼스 투어(동아리 인터뷰), 대학생 인터뷰 등 한 권에도 수십 명의 이야기가 담겼다. 포인트는 '대학생활'인 것 같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겪을 법한 자질구레한 이야기들과 가볼만한 식당, 요즘 할만한 문화생활(영화, 연극, 책 등), 괜찮은 아이템 등이 실려있는데,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간 대학을 더 다닐 대학생들이 보기 좋은 책이었다. 네이버 웹툰의 '대학일기' 같은 발랄함과 공감이 있었다.


이에 비해 대학내일은 '에디터'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표지에 ISSUE로 제시된 주제에 대한 글부터, 영화 리뷰와 에세이까지 읽으며 생각할 여지를 주는 잡지였다. 그렇다고 정보제공이나 인터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캠플이 '대학생활'을 다룬다고 하면, 대학내일의 포인트는 '대학생'이다.


'대학생'이 생각하는 대학교와 세상에 대하여, '대학생'이 고민할만한 이야기들이 담겼다. 다시 말해 '대학을 다니는 나이 때'(물론 누구나 대학을 갈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20대가 많기에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에 생각해볼 만한, 공감할만한 이야기가 진하게 담겨있다. 신입생들보다는 대학을 몇 년 다닌 학생들이 보기에 좋아 보였다.


두 잡지 중 어떤 것이 좋고 나쁨을 평가할 수 없다. 다만 방점이 어느 곳에 찍혀있는가, 어떤 정보를 담고 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개인적으론 낮에는 캠플을 읽고 저녁 귀갓길에 대학내일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현-명)


3. 로망은 있으나 갑갑하다.


더 이상 대학에 로망은 없다. 취업 사관학교다. 하는 말은 1,2년 사이에 나온 말이 아니다. 근 십 년 전부터 있던 말이고 지금은 한 해가 지날수록 가속도가 붙을 뿐이다.



그럼에도 대학에는 로망은 있고,
로망이 있더라도 대학생의 갑갑한 미래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 문장은 모순이 있어 보인다. 대학에 로망이 없다라는 전제를 뒤엎고 그래도 로망이 있어!라고 말해놓고, 대학생이 갑갑하다고 말하다니. 읽는 사람의 머리에선 자동완성으로 '로망이 있으니 아직도 청춘이 좋다.'는 문장이 나왔을 게다.


분명 로망은 있다. 중, 고등학교 시절 "대학에 가면 하고 싶은 것을 다 해야지!"라고 말하며 이월해온 버킷리스트를 내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그러나 모든 대학생이 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경우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지만 자유롭지만도 않았다.


작년에 (본의 아니게) 학과 행사 뒤풀이에 참가한 적이 있다. 고깃집이었고 사람은 바글거렸고 나는 처음 보는 남학생과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었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친구는 1학년이었고 어색한 정적을 깨기 위해서였는지 내게 이것저것을 물어봤다.


선배랄 것도 없는 '나'는 그를 위해 오죽잖은 답변밖에 할 수 없었는데 그 친구의 질문이 자못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국어국문학과에서 취직을 하려면 어떤 과목을 복수 전공해야 하는가. 어떤 과목이 학점을 잘 주는가. 동아리를 지금이라도 해야 하는가. 졸업요건을 채우려면 언제 공부를 하면 좋겠는가. 하는 질문들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지금도 정신 못 차리고 자기소개서 쓸 시간에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말하자면 '뜬구름'을 잡는 과였다. 그저 남들 하듯이 공부를 하고, 남들 하듯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들 하듯이 졸업해서 때가 되면 뭐라도 되겠지 하며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린 적이 없었다. 다만 '쓰는 욕구'는 있어서 습작 소설은 몇 편 끄적였을 뿐이다.


내가 신입생 때를 생각했다. 선배들은 이렇게 말했다.



1학년엔 놀아야지. 놀지도 않을 거 뭐하러 대학에 왔어?



그러나 내 앞에 있는 그에게 차마 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못하고, 조언도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후배님 마음 가는 일을 하시라고. 하지 못했지만 하고 싶었던 일을 도전해보는 것은 어떠겠냐고. 말하며 그를 만족시킬만한 답은 하지 못했다. 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말만 해서 미안했다. 정말로 미안했다.



4. 듣는 귀가 있는 자 들어라.


대학생이 뭐 먹고대학생이지 껄껄껄. 하거나 요즘 애들은 왜 이리 책을 안 읽니. 하거나 하는 말들에는 (우리 때는)이라는 말이 전제되어있다. 비교대상이 잘못되었다. 시대는 바뀌고 시간은 흘러 2017년이다. 2017년의 대학생은 2017년의 대학생활을 한다. 혼자 밥을 먹는다고, SNS 관태기를 앓는다고, 책 보다 휴대폰을 많이 본다고 대학생을 기존의 잣대에 맞춰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전의 대학생이 해야만 하던 고민과 지금의 고민은 분명 다르고, 해가 바뀔 때마다 또 달라지기 때문이다.(나와 그 친구의 감각이 또 다르듯 말이다.)


물론 고액의 등록금의 압박과 취업난, 타지에서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은 주거난, 그 외에도 지금 세대가 원해서 받은 것이 아닌 불황과 불행은 대학생의 탓은 아니다. 3포, 5포, 7포 이젠 N포로 퉁쳐버리는, 꿈도 미래도 포기해야 하는 지금이 그들의 탓이 아니다. 다만 이런 시기에 대학을 다니게 되었을 뿐.


그렇지만 이런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 '대학생들이 불쌍하다. 안타깝다.'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오오오즘 애들은 노오오오오력이 부족해!라는 말은 더더욱 사절이다. 안타깝든 요즘 애들을 비난하든 두 스탠스는 '자신의 입장(혹은 세대)에 비추어' 대학생을 보는 것이다.


캠플과 대학내일이 공감을 얻고, 꾸준히 대학생들에게 읽히는 이유는 '공감' 능력 때문일 게다. 에이- 그건 대학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라서 그런 거지. 하고 넘어갈 시시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 세대는 우리를 이해해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해받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두렵다. 나의 생각이, 나의 말 한마디가 혹여 '나에게만' 치중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나와 다른 세대, 때론 같은 세대에게서도 '공감'하는 능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꼰대가 되고 틀딱이 되고 무개념이 되고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되는 게 아닐까.


군대에서 읽었던 포켓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기억하는 문구가 있다.



듣는 귀가 있는 자 들어라. 보는 눈이 있는 자 보아라.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뉘앙스다. 어쩌면 말하는 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보고 들어서 타인을 있는 그대로 내 안에 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진짜 공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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