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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Dec 01. 2023

[한국문학] 어쩔 수 없음 속에서도 '살아가는' 인간들

정보라, 《저주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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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유의지로 인생을 개척하는가, 운명에 휩쓸리는가.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독자는 작품 속 인물들에 자신을 투영해 그가 느끼는 감각과 감정을 느끼며, 비단 그것이 허구일지라도 동일시하는 경험을 하곤 한다. 나도 그랬다. 어린 시절 만화를 보면서 내가 공감하는 인물들은 대개 주인공들이었고, 그들과 함께 모험하고 역경을 극복하면서 나도 성장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며 점차 몰입의 빈도가 줄어갔다. 

나는 세상 안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였을까. 나이를 먹으며 내 주제와 그릇을 알아가면서부터였을까. 점차 남 얘기 같은 성장서사와 멀어지게 되었고, 히어로 이야기 같은 선택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지 않게 되었다. 대신 조연들의 이야기, 기묘하고 기이해서 방치된 존재들의 이야기 같은 외곽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그런 이야기에 매료된 까닭은 '휩쓸림'에 있었다. 자유의지로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는 이들보다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며 살길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더 내 이야기가 같았으니까. 세상은 극복해야할 것들 투성이고,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하며 뛰어가야 간신히 '평범한' 사람들과 발 맞추어 걸을 수 있는 걸 살아오며 깨달았으니까. 

그때의 나는 그래서 '자유의지'라는 말을 미워했던 것 같다. 최선을 다해 달려와 간신히 도착한 곳이 누군가에겐 날 때부터 부여받은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알았을때, 그곳에서 출발한 이들이 '자유의지'라는 말과 함께 제 스스로 나아간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허무해서 다 놓아버리고 싶더라. 그들과 비교하며 느낀 좌절을 '그래도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는데 배부른 소리 말아야지.'하면서 하향비교하며 안도감을 느끼는 나 자신도 너무 미웠다.

지금의 나는 과거보다는 마음이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쪽에 와 있지만 여전히 '어쩔 수 없음'의 굴레에 빠진 인물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에는 본인의 잘못도 아닌데 운명에 휘말려버린 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고, 더 몰입하며 보았던 이야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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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읽은 콘텐츠


《저주토끼》는 장르문학을 주로 쓰는 정보라 작가의 환상 호러 소설집이다.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 선정작인 2017년 출간소설집 《저주토끼》를 개정하여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 출간했다. 작가의 말을 인용해 '책 전체를 통해 전달하려는 특별한 교훈이나 메시지를 주기보다는'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장르'로서 읽는 재미를 주는 책이다. 10편의 단편들은 저마다 다르지만 스산하고, 기괴한 재미를 준다.

* 소설집의 몇 편만 인용해서 이야기합니다.
* 개인적인 감상이며, 내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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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위로 내려지는 저주의 속성


표제작인 〈저주토끼〉는 가업을 이어온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대외적으로는 대장간이지만, 저주가 깃든 물건을 만드는 것이 대대로 이어진 집안의 일이다.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 된다. 대대로 저주 용품을 만드는 우리 집안의 불문율이다. 토끼는 단 한 번의 예외였다.
〈저주토끼〉 中


술도가를 하던 할아버지의 친구는 그의 가업을 이어받아 전통적인 방식으로 최고의 곡주를 빚어냈다. 그러나 정부의 식량 정책으로 술을 발효할 때 쌀 사용을 금지하면서 고두밥과 누룩을 섞어 발효시키던 전통 방식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친구는 기술개발에 매진했고 정책에 거스르지 않지만 옛맛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망했어."
할아버지는 친구가 좋은 술을 만드는 데만 신경을 썼기에, 그 시대는 그보다는 정부 인사를 접대하고 뒷거래를 해서 커넥션을 만드는 게 중요한 시절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얼마 못 가 음모에 휘말리고 말았다고 말한다. 주정 방식으로 싸구려 술을 만들어내던 큰 회사에서 친구 회사에서 '공업용 알코올을 섞고, 그 술을 마시면 눈이 멀고 불구가 되며 많이 마시면 죽는다'는 비방을 퍼트렸고, 아무리 해명해도 사람들은 친구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사업과 소송 양쪽에서 막대한 빚만 짊어진 친구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할아버지는 그를 위해, 해서는 안 될 일. '저주토끼'를 만든다. 저주토끼는 흰 토끼 모양의 전등으로 등을 쓰다듬으면 불이 들어오는 물건이었다. 인맥을 총동원해서 거래처 직원을 통해 친구를 죽게만든 주류회사 사장에게까지 전달은 되었으나, 문제는 저주의 방식이었다. 저주의 물건을 타깃이 직접 만져야만 했다.

사장은 거래처 직원의 물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창고에 두었다. 저주토끼는 아무도 없을 때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창고에 있는 종이들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상함을 느낀 회사측에서 관리자를 바꾸고, 안에 있는 물건을 다른 곳에 옮겨도 이상한 일은 계속 반복되었다. 회사 내에 흉흉한 소문이 퍼졌고, 직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연 야유회에서 토끼는 새 주인을 찾는다. 바로 그의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전등을 갖고 싶다고 졸랐고, 사장은 개의치 않고 그것을 내주었다.

그 다음 내용은? 예상되는 그 내용 그대로 일 것이다.
저주의 사전적 정의는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람. 또는 그렇게 하여서 일어난 재앙이나 불행.'이다. 문제는 그 재앙이나 불행이 저주의 대상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타깃인 사장의 어린 손자는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 그는 그저 그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운명에 휩쓸렸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 집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식을 잃었다. 가족의 범위를 넘어, 토끼가 종이를 갉아먹어 해고를 당한 창고 관리자나 회사의 세가 기울면서 생계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까지 저주는 무작위로 내려꽂힌다.


불가항력에 휩쓸린 인물들은 원인도, 해결방법도 모른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흔들린다. 그들의 시점에서 더 많은 페이지가 할애되었다면 아마도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세상을 원망하거나, 특정 대상을 증오하며 이유를 찾으려 발버둥치는 장면이 나왔을 게다. 그렇지만 결코 이유를 찾을 수는 없을 테다. 저주는 이유도 인과도 없이 그저 결과만 존재하는 '어쩔 수 없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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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음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와중에도 생은 계속된다. 그렇기에 인물들은 어쩔 수 없음 속에서도 살아간다.

〈흉터〉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 어느 동굴로 '그것'에게 공물로 바쳐진다. 수년간 쇠사슬에 묶여 괴물에게 조금씩 잡아먹히던 그는 묶인 채로 청년으로 성장한다. 새처럼 부리가 있던 그 괴물이 자신을 물고 어디론가 향할 때, '그'는 가까스로 탈출해 숲 속에 떨어진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방황하며 간신히 찾아간 마을, 목부터 척추를 타고 내려오며 등, 옆구리 할 것 없이 가득한 상처가 가득한 그를 사람들은 경계하고 외면한다. 유일하게 손을 내민 사람은 대머리의 중년 남자였다. 구원인 줄 알았던 그 손길은 '그'를 또 다른 동굴로 집어넣는 덫이었다.

마을에 있는 투기장에서 처음에는 투견으로 시작해서 곰에 이르기까지 '나'는 맹수들과 싸움을 해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존재가 된다. '그'는 목덜미를 물리며 죽을 것 같은 순간이면 어딘가에서 뚜둑하는 파찰음이 울리며 기억을 잃곤 했는데, 정신을 차리면 상대 동물이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빨아간, 혹은 주입한 상처들로부터 일어난 어떤 변화였다.

그 점을 캐치한 대머리 남자는 그의 폭력성을 컨트롤하기 위해 초록색 약을 먹이기 시작했고, 자제된 동물성을 제어하며 인간과 싸움을 붙인다. 처음에는 압도적이던 '그'의 공격성은 점차 약물에 중독되며 떨어지게 되고, 구경거리로 쓸 수 없게 되자 다시 숲에 버려진다. 정신을 차리고 마을과 반대편으로 걸어가던 '그'는 우연히 한 집을 발견하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앗아간 '그것'의 진실을 알게 된다.

'그'의 인생은 철저히 타인들에 의해 유린당했다. 공물로 '그것'이라는 괴물에 바쳐지는 것에도, 탈출해서 투기장 속 구경거리로 살아갈 때도, 다시 배회하다가 한 집을 찾아가기까지도 저주 같은 운명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의 인생에 선택권은 없었다. 자유의지 같은 말은 어불성설이다.
(후에 그는 자유의지를 발휘해 단 한 번의 선택을 한다. 자세한 내용을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있기에 살아간다. 우리가 태어난 데에도, 살아가는 데에도 이유가 없듯이 운명을 견디어내며 그저 시간이 흐르는 방향에 몸을 맡긴다.

문득 저주가 인과도 없이, 이유도 없이 무작위적으로 뿌려지듯. 사람의 운명이나 팔자도 결국 무작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사다마나 새옹지마처럼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인생이 있는 반면, 온 세상의 행운을 다 몰아주거나 반대로 불행을 다 부여받은 인생도 있다. 어린 시절은 유복하다가 일생을 바닥을 길 수도 있고, 반대로 나이가 들며 대대손손 승승장구하는 삶도 있다. 모두가 그걸 의도하고 태어난 건 아닐 게다.

그러나 어떤 운명을 쥐고 태어났든지 모든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같은 결말이 예고되어있다. 마지막에 닿기까지 살아있기에, 어떻게든 살아가는 게 인간의 여정이다. 《저주토끼》의 단편들에서 역설적으로 생의 의지가 느껴지는 건 휩쓸리고 휘말려도 인간의 시계는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운명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한 존재다. 그러나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점에서 한없이 강한 존재다. 수없이 마주하는 어쩔 수 없음의 문턱에 좌절하고 미끌어지고, 때론 운좋게 넘어가면서 인간은 그냥 살아간다. 투입 대비 산출량이 예상한대로 나오지 않고, 이치에 맞게 행동해도 그에 걸맞는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인간은 죽기 전까지 살아간다. 인생은 무얼 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있기에 숭고하고, 무한하고, 위대한 게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하고나니 뜻대로 안 풀린다며 앞서가는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좌절하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어쩔 수 없음' 속에서 살아가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했던 시간들이 우습게까지 느껴졌다. 핵심은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살아가는'에 있었다. 자유의지를 발휘하든지 운명에 쓸려 이리저리 흩날리든지는 중요치 않다.

교훈이나 메시지는 없고, 그저 대중문학으로 읽은 즐거움을 경험하길 바란다는 작가의 말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들이었다. 그의 의도와는 엇나간 독서경험을 한 건 애석하지만 내게는 재미도 의미도 동시에 찾아온 책이었다. '살아있음'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된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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