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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Dec 22. 2021

오빠, 나 할 말 있어


남편이 첫째를 재우러 들어간 지 두 시간,

조용해진 걸 보니 첫째가 잠든 듯하다.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 ! 나 할 말 있어.

- 웅?

- 쓰레기 버리기랑 분리수거,

-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주로 하고 있는데,

아직 말을 맺기도 전에 남편에게서 답장이 왔다.

- 웅 주말에는 내가 할게 ㅜㅅㅜ 오늘 게을러서 못했네

-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듣겠다고 꺼낸 말은 아니었으니 할 말은 다 하기.​

- 당연히 내가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좀 서운해.

- 출산하고는 무거운 거 들지 말랬는데, 그런 거 배려 안 해주는 거 같아.

신혼 초 쓰레기 버리기나 분리수거는 주로 남편이 담당했다. 대신 바닥 청소는 내가 했고.

이후 첫째를 낳고 청소기를 사고 아파트로 이사 오며 집안일 분담의 경계가 많이 흐려졌다.

한 사람이 움직이면 나머지 한 사람도 재빨리 할 일을 찾아 같이 후딱 해치우고,

아이가 잠들어 쉴 틈이 생기면 둘이 같이 시시덕거리며 놀아야 했으니까.

첫째를 낳고 내가 육아휴직을 하고 있을 때도

남편은 매일 아침 청소기를 돌리고 저녁에는 아이 목욕을 전담하며 성실한 남편, 아빠 역할을 했고,

연이어 남편의 육아휴직 중에는

내가 매일 아침 매트를 닦아두고 저녁이면 아이랑 놀아주면서 남편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했다.

그랬던 우리에게 둘째가 생기고,

나는 두 번째 육아휴직.

둘째는 하루에 열 번씩 맘마를 먹고, 하루 한 번 목욕을 하고, 수시로 안아달라며 운다.

그나마 둘째가 잠든 시간에는 첫째가 서운할까 봐 놀아주느라 바쁜 우리.

때문에 아침에 정돈해둔 집은 저녁 무렵이면 다시 발 디딜 틈 없이 엉망이 된다.

두 아이가 1~2시간 간격으로 갈아입는 기저귀로 쓰레기통은 하루면 가득 차고,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선지 음식물 쓰레기와 분리수거용 쓰레기도 늘 차고 넘친다.

쓰레기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는 게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닌데도,

남편이 집에 있는 날은 내심 남편이 해주기를 바랐던 걸까.

저녁 무렵부터 넘칠 듯 말듯한 쓰레기통을 열 때마다 괜히 심술이 났다.

남편이 쓰레기통 근처로 다가가면 혹시 버리고 오겠다고 나서지 않을까 하며 눈치를 주고,

남편이 안고 있던 둘째를 넘겨받으며 '오빠, 할 일 있으면 해'라고 괜히 떠보기도 하고,

그럼에도 남편이 눈치를 못 채고 '나 할 일 없는데? 샤워만 하면 돼' 하고부터는

내 마음에 든 이 뾰족한 말을 어떻게 꺼낼지 고민하기 시작.

다정다감한 성격이 못 되는 나는 사실 이런 상황에서 융통성이라고는 없이 직설적으로 말해 상대방의 화를 돋우는 편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

- 오빠 분리수거 안 할 거야? 이제 오빠 일 아니라는 거지?

아니면 아무 말 없이 정말 생뚱맞게 밤 열한 시쯤 갑자기 주섬주섬 옷을 입다가 남편이

- 뭐해? 어디 가? 물으면

- 쓰레기 버리고 올게.

- 지금 이 시간에?

- 가득 차서 넘치기 일보 직전이잖아.

그러면 남편은 남편대로 황당해서 내 표현방식에 대해 지적을 하고,

그럼 또 나는 문제의 본질을 들먹이며 나를 지적하는 남편의 태도에 화를 내고.

그런데 이번에는 아이들을 재우느라 각자 방으로 흩어져서 남편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아침 일찍 일어나 첫째 먹을 밥 세끼 다 챙기고,

밀린 빨래 다 돌리고,

같이 먹을 저녁 사러 추운 날씨에 외출까지 하고,

저녁 내내 첫째랑 놀아주고 또 재우느라 고생했는데

가시 돋친 말을 들으면 힘이 빠질 것 같고, 억울한 기분도 들겠다.

하지만 또 내 마음속에 담아두고만 있기는 싫어서 고르고 고른 말이 ​

- 당연히 내가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좀 서운해.

- 출산하고는 무거운 거 들지 말랬는데, 그런 거 배려 안 해주는 거 같아.

숫자 '1'이 없어지자마자 남편에게서 답장이 왔다.

- 서운했구나 미안해 ㅠㅠ 내가 생각이 없었다 미안미안

- 신경 더 쓸게! 정신없이 있다 보니 배려 못 했다 ㅠㅠ

- 쓰레기랑 분리수거 내가 다 할게

오늘 아침 출근 전에도 남편은 몇 번이나 당부했다.

"쓰레기 버리지 마~ 저녁에 와서 내가 할 거니깐."

그리고 나는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제일 먼저 쓰레기부터 버리러 갔다.

20L 종량제 봉투 가득이랑 분리수거 봉투 세 개, 겹겹이 쌓인 종이박스까지 버리느라

세 번이나 내려갔다 올라오기를 반복했지만 별로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남편이 다 하겠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일 테다.

만약 남편이 내 말에 발끈해서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그것도 못해?"라고 했다면

가벼운 종이박스 하나도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을 터.

내가 서운했던 이유는 남편이 쓰레기봉투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니까.

그게 아니라는 걸 확인한 후에는

쓰레기 따위 누가 버리든 상관없는 가벼운 문제가 된다.



+

밤 11시 반.

거실에서 탁탁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선글라스 차림의 남편이 파를 썰고 있다.

이 밤에 웬 파냐고, 내일 내가 썰겠다고 하니

자기가 분리수거를 못 해서 미안해서 그런다는 남편.

그런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해서

난 또 뭘 해주지 고민하게 된다.

이렇게 서로 고마워서, 또 미안해서,

더 잘해주다가 그게 고마워서 또 더 잘해주면서,

내내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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