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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May 18. 2016

더 좋아하는 사람은 억울하다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

잠깐 정신이 들어 눈을 떴는데 사방이 깜깜했어.

손을 더듬거려 휴대폰을 찾아 시간을 보니까 9 : 44.

'아, 내가 잠들었었지' 그제야 조금 기운을 차리고 방에 불을 켰어.

한 시간 넘게 잤던가봐.

옷도 안 갈아 입고 화장도 지우지 않고 뻗는다는 말처럼

집에 오자마자 겉옷만 벗고 바로 잤거든.

어떻게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저 잘 찾아온 게 다행이다 싶었어.


오늘은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무거워졌어.

물에 젓는 솜처럼.

갈수록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머리도 눈도 자꾸 감기려 드는 거야.

평소 같았으면 흘려들었을 부장님 핀잔도 조금도 여과되지 못한 채 

그대로 흡수돼서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 걸 간신히 참았어. 



얼마 있다 너한테 전화가 왔고

나는 받기 전에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잔뜩 잠겨있던 목소리를 풀기 위해서.

남들보다 퇴근이 늦은 너는 늘 열 시 언저리에 나한테 전화를 하곤 해.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고서 운전석을 반쯤 뒤로 젖히고 

노곤한 몸을 뉘인 채 너는 지금 내 목소리를 듣고 있겠지.


두런두런 하루를 토로하는 그 시간이

나는 참 기다려지고 반갑고 행복해. 

넌 주로 듣는 편이고, 열심히 떠드는 건 내 몫.


있는 일 없는 일 다 뒤져서

너만의 앵무새가 된 듯 들뜨지만 부드럽게.

내 이야기에 흠뻑 빠져서 고단했던 너의 하루가 싹 가실 수 있도록

듣기 좋게 쫑알거리기.


언젠가 네가 그랬어.

내가 밝아서 좋다고.

그래서 퇴근할 때마다 나한테 전화를 걸게 된다고. 

그 말을 들은 뒤부터 너는 내가 더 좋아졌을까.

두배 세배는 밝아졌으니까 말이야.


근데 있잖아.

네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어.

나는 원래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

태어나길 웃음이 많아서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긍정적이고 유쾌한 사람과 난 거리가 멀어. 

그래서 오늘 같은 날은 밝은 척하기가 힘들었어.

구멍 난 풍선을 계속해서 불어야 하는 심정이었거든.


자정이 됐을 무렵,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왜 전화했어'를 시작으로 계속 '응, 아니'

단답으로 이어진 무심한 말투에도 이상하게 엄마는

전화를 빨리 끊지 않았어.


기어이 감자 한 박스를 싸게 샀고 

새로 생긴 목욕탕이 좋았으며 

아주머니들하고 나눴던 농담까지. 

다 들려주고서야 '이제 자야겠다'고 하시더라고.


다음날 아침 엄마는 문자 한 통을 남겼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흐르더라.

'우리 딸, 안 좋은 일 있었구나.

엄마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상냥하게 굴어. 

힘들고 짜증 나도 회사에선 티 내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어제는 네가 얄밉고 밉기까지 했어.

나아닌 나를 연기하게 해놓고

진짜 내 기분은 헤아려 볼 생각도 못하고

피곤할 때마다 내게 기대는 너니까.


더 좋아하는 사람은 늘 억울한 건가 봐.

두 개밖에 없는 과자를 전부 내주고도 

섭섭해하거나 화를 내서 

이런 나를 알아 달라고 해서는 안 되는 건가 봐.



차갑고 쌀쌀맞은 나를 키우면서 우리 엄마는 참 억울했을 거 같아.

내가 잘못을 해도 손을 내미는 건 항상 엄마였거든.

그리고 화 한번 제대로 못 냈어.

엄마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니까.


내가 너 때문에 노력하는 거

어느 날은 정말이지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애를 쓰며

네 마음을 잡기 위해 바둥거리는 거

그건 당연한 일이니까, 특별히 힘들다 느끼지 말라고

엄마는 그 말이 하고 싶었을까.


누군가를 더 좋아하는 사람은 억울해.

그건 처음부터 정해진 법 같은 거였어.

답답하고 서러워도 별 수 없어.

내가 더 좋아하니까.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 나는 이제 조금 알게 된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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