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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May 22. 2016

돌아가고 싶은 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로운 오후였다.

햇살은 따사롭고 공기는 부드러워서 

바람을 이불 삼아 세상 모든 것들이 낮잠에 빠지기 좋은 때였다.

그 온화한 풍경 속에서 우리 두 사람도 푹신한 의자에 앉아 나른한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라곤 네가 진작에 마셔버리고 남은 얼음을 빨대로 빙글빙글 돌리며 생기는 

짤랑거리는 유리잔과의 마찰음뿐이었다.



"이 얼음 왜 이렇게 안 녹지?"

한동안의 침묵을 깬 너는 얼음 하나를 입에 넣고 와그작 씹으면서 물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창밖으로 지나는 한 커플을 보면서 또 엉뚱하게 물었다.


"스무 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너는 나를 만날 수 있을까?"

그때도 나는 너의 그 질문이 어려웠던 거 같다.

질문이란 게 묻는 이의 의도가 있기 마련인데, 그 질문은 지금 생각해도 모호하니까.

너와 내가 운명으로 얽힌 사람들인지 하늘을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인지

다시 돌아가서도 너는 나를, 나는 너를 택할 것인가라는 의지를 말하는 것인지


그래서 넌 어떨 거 같냐고 답을 미뤘고, 잠시 생각에 잠기던 너는 이내 입을 떼었다.

"너 그때도 빵순이였지? 내가 엄청 맛있는 빵집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을게.

네가 찾아오고 싶을 만큼 TV에도 나오는 소문난 빵집.

잘생긴 남자가 계산대에 서있는데 네가 그냥 지나치겠어?"


"스무 살 외모는 자신 있나 본데?"

장난스런 대답으로 우리는 편안하게 웃었고, 살랑이는 봄바람이 자리를 남기지 않듯이 

그 후로 나는 그 질문을 떠올렸던 적이 없다.


자고 싶은데 잠은 오지 않는 어느 새벽녘,

잠들지 못하는 이유가 너무 조용해서는 아닐까, 집안의 적막한 공기에 휩싸인 나머지

작은 신경들까지 또렷이 깨어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마음에 드는 작은 소음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이미 방영이 끝난 한 방송을 보게 됐다. 여배우들이 여행을 떠났던 프로는 그간의 여정을 돌아보며 

에필로그를 담고 있었는데 제작진은 그들에게 묻고 있었다. 

스무 살, 젊은 시절로 돌아가면 하고 싶은 일이 있느냐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대답을 짐작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의 순간을 두 번 갖게 되면, 자신이 택하지 않았던 반대급부를 고르는 편이니까.


60대 여배우는 진짜로 돌아가기 싫다고,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다 말했다.

연애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었던 그때는 '무모한 나이' 인 거 같다고.

젊어서 무모했던 그 시절이 자신은 힘들었던 거 같다고. 


돌이키고 싶지 않은 삶이란 어떤 걸까 

지금은 다시 못할 겁 없고 어리석은 결정의 순간이 빼곡한 것일까

한 번이라서 가능한 정성으로 찰나를 채웠던 진심의 기록들일까 


아마도 너는 묻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냐고. 지금 이 사랑에.

아니라면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때 인정해야 했어.

최선이 아니었다고. 귀찮고 피곤하지 않을 때만 너를 찾았고, 

남들 보기에 적당히 좋아 보이는 연인이 되고 싶었다고. 


너와 헤어지고 결코 아프지 않았던 것도 너와의 시간들이 행복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야.

싸우지 않겠다고 더 잘해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야.

똑같은 시점에서 우리가 끝을 맞이 한대도 좋아.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만 최선을 다하고 올 거야.

돌아갈 수만 있다면.


울고 불고 곪고 터지는 안 예쁘고 불편한 사랑

그런 사랑을 하고 돌아오고 싶어.

내가 늙어서 '돌아가고 싶은 시기가 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진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기가 하나 있다고

너를 만났던 그 시간만큼은 절대로 되돌리고 싶지 않다고

나는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어. 


평화로웠던 그날 오후, 너는 혼자서 슬픈 생각을 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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