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아파야 누군가는 아물 수 있는 걸까
"어떤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하잖아."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면서 네가 그랬다.
"응. 그게 왜?"
약간은 몽롱한 기분이었던 나는 시원한 밤공기를 맞으면서
그저 고분고분하게 네 말에 반응했었어.
"그럼 반대말은 증오나 미움일 테고.
근데 비슷한 말, 동의어는 없어.
사모한다거나 그리워한다거나 연모한다거나.
이런 말도 누군가에게 보내는 애틋함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다르잖아.
미묘하게도 아니고 대놓고 달라.
그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한 게 있다기보다 본래 다른 성격의 것들이지."
"음... 그렇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타나는 가로수에 정신이 팔려서 건성으로 대답했던 거 같아.
어느새 꽃은 지고 짙은 푸름이 매달려 있어서 신기했거든.
"근데 또 한쪽만 상대편을 사랑하는 짝사랑은 말이야.
동의어가 굉장히 많아요.
외짝사랑, 척애, 편련, 외쪽사랑.
얘네들이 다 짝사랑의 표기만 다른 말들이야."
내 한쪽 어깨에 팔을 걸치면서 너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하는 사랑보다
한 사람이 하는 짝사랑이 세상에는 더 많다는 거야.
사랑한다고 '사랑해'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보다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그래서 짝사랑은 그렇게 다른 이름이 많은 거라고.
힘내. 기죽지도 말고. 너만 혼자 하는 거 아니니까.
벌써 든든하지? 알게 모르게 너 같은 사람이 수두룩 빽빽하다고 생각하니까 말야."
차갑게 들이켰던 술이 아직 내려가지 못하고
가슴 언저리에 머물러있었는데, 왠지 네가 해주는 말을 들으니까
따뜻하게 풀려서 내려가는 거 같았어.
"이제 혼자 갈 수 있지? 나는 버스 타러 간다~"
마지막으로 편의점에서 캔맥주 어떠냐고 하니까
손을 흔들면서 너는 이미 뒷모습으로 사라지고 있었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또다시 그 사람에게 고백을 했어.
열 번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으니까, 늘 나한테 찍어볼 용기를 주는 네가 있어서
나는 뻔뻔한 얼굴을 하고 찾아갈 수 있었던가봐.
아니라고 하면 한잔하자고 너를 불러낼 참이었는데
오늘 모하냐고 문자도 보내 놓았는데, 그날 나는 너를 만나지 않았어.
그 사람 결국 나를 받아 줬으니까.
그 뒤로 좀처럼 연락이 없다가 몇 주 만에 만났는데
오랜만에 보는 네 얼굴은 꺼칠했고, 다시 회사로 들어가야 한다면서
너는 커피를 반도 마시지 못한 채 떠났어.
짝사랑 끝낸 거 축하한다고.
나한테도 축하할 일이 있는데, 내 짝사랑도 끝이 났다고.
당분간은 바쁠 거 같아서 좀 지나면 거하게 축하하자고.
웃으면서 말하는데 깊고 검은 눈은 계속 흔들렸어.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다가는 내가 울어버릴 거 같아서
오히려 도망치듯 떠난 네가 고맙기도 했어.
나는 물어볼 수가 없었어.
네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대체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나한테 해줬던 것처럼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다고 위로할 수가 없었어.
네가 외사랑을 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받아주지 않아서 한쪽만 상대편을 사랑하는 일.
그걸 외사랑이라고 한대.
짝사랑보다 더 가혹한 말이 있다는 거 넌 알고 있었니.
한 사람만 사랑을 하는 것도 아픈 건데
그 사실을 들키고도 계속 혼자서 사랑을 해나가는 건 더 아픈 거잖아.
나는 모를 거야.
내가 사랑을 받았다는 것도
네가 어떤 마음으로 내 사랑을 응원했을지도
꺼내본 적 없이 끝나는 너의 사랑도
생각해보면 너는 늘 혼자였다.
나는 너라도 있었지만
너 때문에 덜 아팠을 거지만
너는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혼자서 고스란히 아팠던 거였다.
끝까지 모를거니까
조금만 아파하고 돌아와.
네가 아프지 않아야 난 네 옆에 있을 수 있으니까.
두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거,
어쩌면 많은 이들의 짝사랑 속에서 가능한 것일지 모르겠다.
누군가 아파야 누군가는 아물 수 있는.
질량 보존의 법칙이 내 사랑을 지킨 거 같아 마음이 아린 어느 날.